다름, 아름다움

2025-06-17

작은 집을 지었다. “부럽다”라면 집을 안 지어본 사람이라는 데 500원. 집을 짓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오갔던 내용증명 서류 숫자, 나올 듯 안 나오는 준공을 기다리던 고시원의 축축함, 죽기 전엔 끝날까 싶은 대출이자 때문만은 아니다.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다르게 살겠다”는 소심한 표현이어서다. 아파트의 가치, 잘 안다. 편리함, 투자 가치와 환금성 등등 모를 수 없다. 셈 밝은 지인은 “남들처럼 아파트 투자를해야지”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남이 아닌걸.

집을 짓겠다는 엄두를 낸 2018년 2월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터다. 이 집은 나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고, 손이 많이 가지만, 확실한 나만의 공간. 이곳에서 나는 진짜 내가 된다. 모두가 주택에 살아 마땅하다는 주택 찬가를 부를 뜻은 없다. 남은 내가 아니다. 아파트라는 편리함과 가치를 선택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어느새 다름을 열렬히 배척하는 데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듯하다. 인류가 사나워진 까닭이 여기 있지 않을까. 다름은 틀림의 다른 이름이 돼버렸다. “그건 달라”를 “그건 틀려”라고 말하는 우리네 말 습관에서 그런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영어 표현 ‘서로 의견 차이를 인정하다(agree to disagree)’를 보자. 1740년 영국 정치인 조지 화이트필드가 종교인 존 웨슬리와 벌인 논쟁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이다. 21세기에도 민주주의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주춧돌과 같은 말이다. 인류의 기본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가하지 않는 한 내가 나로 생각하고 살아가며 남을 존중하는 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다.

밀레니얼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런던베이글뮤지엄이라는 현상을 빚은 인물, 료(僚)는 16일 『료의 생각 없는 생각』(열림원) 출간 인터뷰에서 말했다. “모두가 다르게 태어났고, 다른 게 당연한 데도, 우린 같아지지 못해서 불안해하죠. 내가 나를 구해야 남도 구할 수 있어요.”

강원도 유포리 박성희 건축주의 『집의 일기』(책사람집) 구절도 떠오른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중략) 집을 지어 사는 삶 그 자체를 생각하는 일이다.” 읽으며 깨닫는다. 나는 나를 짓고 싶었구나.

각자 다르게 아름다운 나를 묻고 찾고 짓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조화롭기를. 주택도, 아파트도, 고시원도 좋다. 내가 나일 수 있고, 남을 남으로 존중할 수만 있다면.

올 가을 청와대로 입주할 대통령도 그러기를 바라는 건 과욕일까. 한국이라는 국가는 결국 한국인이 사는 집이다. 새 가장은 어떤 삶을 지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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