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역할

2025-06-17

봄이 떠나고 여름이 들어서려는 간절기, 유월이다. 이달도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절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사람보다 먼저 찾아오는 새벽 풋 바람에 흔들리며 여명이 머지않았음을 알려준다. 마치 저 자명종처럼 뎅그렁뎅그렁 큰 소리로 울어대면서.

내게 주어진 역량보다 과한 업무량 때문에 뒤엉킨 마음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는지 근자에는 정신없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법당에 올린 향이 맑게 피어오름을 보고서, 그제야 비로소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말이다. 아마 잠깐이라도 마음을 내려두라는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다툼의 씨앗은 소통 부족

여러 측면에서 상대 고통 살펴

공감하는 타인의 모습 보여야

남들로부터 칭찬받는 삶은 생각보다 피곤하다. 칭찬 뒤로 뭔지 모를 요구가 계속해서 따라오는 것만 같아서다. 예를 들어,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칭찬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헌신적인 태도를 늘 견지해야만 하는 압박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언제라도 사람들을 웃으며 대해 줘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론 나는 그러지도 못한다.

이렇게 제 앞가림도 못 하는 나를 만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답답하고 마음 둘 곳 없는 그들을 무심하게 외면한다면, 수행자로서의 기본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 되고 만다. 시원한 답을 내어줄 만큼의 도력은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숨소리도 아껴가며 듣는 타인의 역할은 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 그들이 하소연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가족이나 직장 동료처럼 가까운 이들과의 인간관계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 지붕 아래 같은 밥상을 쓰는 부부나 부모, 형제, 자식, 또는 한 직장에서 생활하는 상하관계, 동료들과의 관계 문제다. 모두가 가까운 사이지만 한마음으로 뭉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끝은 항상 회한과 참회를 넘나들며 글썽이는 눈물로 마무리된다.

가만히 보면, 인간의 모든 관계 문제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대화가 부족해서다. 이는 곧 이해가 부족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해 없는 대화란 일방적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앞세우다 보면 그건 통보가 된다. 합의 없는 통보는 아무리 혈연관계로 구성된 가족이라도 듣는 이에게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게 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보다 아내나 남편 혹은 부모 자식의 말과 입장을 경청하는 것이 우선인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잊고 자기주장을 관철하려는 데서 최선의 답과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가정의 파괴는 죽음이나 화재보다 말다툼으로 인하여 발생한다”라는 말이 있다. 『유토피아』를 저술한 영국의 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남긴 말이다. 말다툼으로 인해 가정이 파괴된다고 하는 걸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살아가는 모양새는 매한가지인 듯하다. 어쨌든 다툼은 소통의 부재가 원인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게다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고, 그 씨앗이 자라 다툼과 불화라는 이름의 나무가 되어 버린다.

자 그럼, 그 말다툼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

우리는 항상 문제의 뿌리에 접근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들여다볼 줄도 알아야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인간이 겪는 상황에는 참 다양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고 치자. 당장에 아내는 너무나 슬프고 괴로워할 것이다. 하지만 슬픔을 이겨낼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예전보다 더 자유로워진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온통 슬픔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만약 돌아가신 분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면 더 빨리 홀가분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혹여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사람 또한 없다. 그러니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된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그저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풍경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존재의 속성과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여 아는 통찰의 지혜를 말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연기(緣起)의 법칙을 깨달은 사람의 지혜이다. 특이하게도 이 지혜는 다양한 측면을 볼 줄 알게 만든다. 또한 나와 너, 맞다 틀리다, 이것과 저것을 갈라 나누지 않는다. 통째로 연결하여 바라보는 시각이다. 나와 연결된 누군가 아파하면 나도 아플 수 있고, 우리가 타인이라고 생각하는 누구라도 나에게 아픈 손가락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나 또한 모두에게 역력한 타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도 되고 아픔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타인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바로 선한 영향력의 실천이다. 그것에는 크고 작음의 구분이 없다. 내가 행한 선이 메아리가 되어 나를 평온한 삶으로 보답해 줄 테니까.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