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속 주요 장면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15일 광복 후 전 세계 어느 국가도 경험하지 못했던 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불과 80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명실상부한 10대 무역대국으로 성장했다. 남북분단과 6·25전쟁, 산업화와 독재, 민주화운동 등 역사의 갈림길마다 어려운 선택을 해왔지만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다. 세계일보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고난과 환희의 순간이 반복된 우리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주요 장면을 모아봤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반도에 광복이 찾아왔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좌우 이념의 격전지로 변했다. 좌익과 우익은 신탁통치 방안을 두고 극심한 대립을 벌였고, 송진우·장덕수·여운형 등 주요 인사들이 암살되면서 좌우합작 시도는 좌초됐다. 미·소 군정 하에 혼란이 이어지던 가운데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이 관할하는 38도선 이남에서 1948년 5월10일 총선거가 실시됐다. 제헌국회는 같은 해 7월17일 헌법을 제정했고, 국회 투표를 통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했다. 보수 진영은 이날을 ‘대한민국 건국’의 시점으로 본다. 반면 진보 진영은 1948년을 ‘정부 수립’으로 규정하고,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전쟁 비극… 분단 고착화
1945년 8월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됐다. 1948년 8월과 9월 남쪽과 북쪽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됐다. 분단으로 인한 갈등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이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감행하면서 6·25전쟁으로 이어졌다.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대한민국은 미군과 유엔군 파병에 힘입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켰다. 6·25전쟁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100만명에 달하는 민간인 사망·부상·실종자, 군인 사상자와 실종자 62만명, 유엔군 사망·실종자 15만명이 희생됐고, 1953년 정전협정으로 한반도에는 38도선을 대신해 휴전선이 그어졌다.
빛바랜 4·19혁명… 군사정권 등장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났다. 1951년 10월1일 영국 ‘더 타임스’는 “폐허의 한국에서 건강한 민주주의가 생겨나길 기대하는 것보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자라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며 한국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비관했다. 그 비관적 전망은 현실이 됐다. 이승만정부는 1950년대 내내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갔다. 하지만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반발한 국민들이 거리로 나서며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이끌었다. 청년층이 시위를 주도했고, 4월19일 경찰 발포로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혈 진압에 국민 여론이 폭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26일 하야했으며, 민주당 장면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은 출범 1년도 채 되지 않아 막을 내렸다. 4·19혁명 이후의 사회·정치적 불안을 수습할 통치 역량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틈을 타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눈부신 경제성장 ‘한강의 기적’
1955년 100달러도 안 되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40년 만인 1995년 1만달러를 돌파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궈낸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세계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다. 첫 단추는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5개년 계획의 핵심은 해외에서 돈을 빌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수출 공업화였다. “외채의 이자는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일요일에도 쉬지 않는다”는 우려 속에 5개년 계획이 추진됐다. 가발·섬유·신발 등이 1960~1970년대 수출 효자상품이었다. 1964년 1억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 1973년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선언했다. 포항제철(포스코)을 세우고 자동차·조선에 적극 투자했으며 전자산업을 육성해 오늘날 제조업 강국의 기틀을 닦았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1980년대 중반에 빛을 본다. 1986∼1988년 저환율, 저금리, 저유가의 ‘3저 효과’로 중화학공업 수출이 날개를 달았다.
짓밟힌 민주화… 5·18민주화운동
1979년 12월12일 군홧발에 대한민국이 다시 한 번 짓밟혔다.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등 신군부 세력은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민주적 선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쿠데타에 국민의 반발은 거셌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했다. 계엄군은 신군부 세력 퇴진을 외치는 광주를 철저히 짓밟았다. 공식 사망자만 166명이다. 광주를 유혈진압한 전두환은 같은 해 9월 11대 대통령에 올랐다. 1996년 서울지방법원은 12·12군사반란과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에게 사형을, 노태우에겐 징역 22년6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듬해 전두환에게 무기징역, 노태우에게 징역 17년을 확정판결했다. 같은 해 12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이들을 모두 사면했다.
대통령 직선제 이끈 6월 항쟁
1987년 6월 국민이 독재 정권에 맞서 일어섰다. 그해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며 국민적 분노가 확산됐다. 공안당국의 은폐 시도에도 언론 보도가 이어졌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진상을 폭로하면서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6월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고, 이는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10일부터는 대학생뿐 아니라 시민들도 거리로 나섰다.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의 진입을 막고 명동성당에 농성 중인 시위대를 보호했다. 전국적인 시위에 전두환 정권은 강경 진압을 검토했지만, 미국의 반대와 군부의 소극적 태도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결국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외환위기 전국민 금모으기 동참

1997년 외환위기로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정부는 그해 11월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공식적으로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으로 평가되는 1997년 외환위기는 기업의 대규모 구조조정과 실업률 급증으로 중산층을 무너뜨렸고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IMF의 요구로 시작된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 체계 개편, 경영 투명성 강화 등은 한국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국가신용도를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수많은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했고, 그 결과 약 225.79t의 금이 수출돼 22억달러에 달하는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는 1997년 11월 한국의 외환보유고(20억달러)보다도 많은 액수로 IMF에서 차관으로 받은 210억달러의 10%에 해당한다.
반세기 만에 첫 남북 정상회담

2000년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공항에서 출발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활주로에 나와 김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맞았다. 남북 정상은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눴다. 1948년 분단 이후 반세기 만에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김 대통령은 2박3일간 평양에 머물며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관계에 이정표가 될 6·15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두 정상은 남측의 연합제 통일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에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고,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협력 등 다양한 교류·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은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 조성에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김 대통령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8년 시차두고… 두 대통령 파면
8년의 시차를 두고 두 명의 현직 대통령이 헌법 절차에 따라 파면됐다. 2016년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은 민간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으로 국회에서 여야 의원 234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됐다. 이후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헌법 수호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며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 대통령을 파면했다. 8년 뒤인 2024년 12월3일 윤석열 대통령은 ‘종북 반국가 세력 척결’을 명분으로 심야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다음날 오전 1시, 여야 의원 190명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같은 해 12월14일 윤 대통령은 국회의원 204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됐다. 2025년 4월4일, 헌법재판소는 “대한 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했다”며 재판관 전원일치로 윤 대통령을 파면했다.
BTS 신드롬, 한강 노벨문학상
독립운동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며 꿈꿨던 문화강국도 현실로 다가왔다. 다양한 장르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수상 소식이 잇따르며 한국 문화의 저력을 뽐내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2019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데 이어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을 휩쓴 게 대표적이다. 전 세계 K팝 열풍을 이끈 방탄소년단(BTS)은 2020년 한국어 노래인 ‘라이프 고즈 온’으로 빌보드 63년 역사상 처음으로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2022년에는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미국 최고 권위의 방송 시상식인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황동혁)과 남우주연상(이정재) 등 6관왕에 올랐다. 지난해에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온 국민을 전율케 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