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홍범 씨는 겉으로는 유쾌해 보이지만,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웃는 얼굴 뒤에 깊고 어두운 동굴 하나를 숨기고 있는 듯한 사람이다. 삶의 고비마다 주저앉기보다는 옆과 뒤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을 챙기는 태도에서 그런 인상이 느껴진다. 짧은 말 한마디에도 배려와 신중함이 담겨 있다.
돈을 벌어도 혼자보다 함께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택했고, 여러 번 넘어졌어도 어두운 마음을 눌러가며 유쾌하게 살아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2024년 6월 3일에 진행한 인터뷰를 늦게 소개합니다. 아래 QR코드를 통해 배홍범 전 우리환경개발 대표의 인터뷰 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배홍범입니다. 소속도 밝혀야 하나요? ‘우리환경개발’이라는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경제 활동을 해왔고, 지금은 함께 나누며 먹고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우리환경개발은 어떤 회사인가요?
사회적기업이자 자활기업입니다. 차상위 계층에 있는 분들을 채용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습니다. 주로 청소, 학교 방역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Q. 그 사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시작한 지는 4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Q. 그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여러 가지 일을 해봤습니다. 젊었을 땐 시내에서 음식 장사도 했고, 레스토랑도 운영해봤고, 노동조합 활동도 했었습니다. 하나를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해봤습니다.
Q. 직업을 자주 바꾸신 이유가 있을까요?
하나에 올인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는 건지, 아니면 방랑벽 같은 게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제대로 된 성공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이것저것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Q. 해봤던 일 중에 다시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요?
딱히 떠오르는 건 없습니다. 젊었을 때, 26살에 처음 술을 배웠고 27살에 시내에 가게를 열었습니다. 철없던 시절이었죠. 가게 인수 후 인테리어하는 데 한두 달 걸렸고, 영업 시작 후 두 달 만에 IMF가 터졌습니다. 나라 전체가 위기였고, 작은 가게 하나 운영하던 제가 어떻게 그런 상황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직원들을 내보내고 제가 직접 주방에 들어갔고, 울산 요리학원에서 요리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준비도 부족했고 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게를 차릴 때도 제 돈이 아니라 집안 어른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으니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모양 빠지기도 했고, 동시에 세상은 참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배운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Q. 그런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망하고 나서 TV를 봤는데 드라마에서 배우 안재욱이 배를 타고 있더라고요. 답답하고 막막하던 차에 저도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상선을 탔습니다. 액체 화물 운반선으로, 홍콩, 중국, 일본, 한국을 오갔습니다. 당시엔 IMF 시절이라 취업하기 위해 돈을 주고 탔습니다. 20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오히려 돈을 받고 타겠지만 그땐 국가 부도 상황이었기에 뒷돈까지 주며 승선했습니다.
Q. 수입은 괜찮았나요?
아니요. 돈을 벌기보다 그저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부산에서 2주 교육 받고 무작정 승선했습니다.
Q. 항해 시간은 어느 정도였나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조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빠르면 2박 3일이면 한국에서 일본, 중국까지 갑니다. 에피소드 하나가 기억나는데, 배를 타고 중국을 향해 가는데 바닷물이 흙탕물이더라고요. 선장에게 물었더니 "이게 바다가 아니라 양쯔강이다"라고 하더군요. 폭이 수 십 킬로미터(?)나 되는데 뭍이 안 보이니 당연히 바다인 줄 알았죠. 선장이 말하길 배를 타고 끝까지 가면 7박 8일도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큰 배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며 올라가야 한다더군요. 그때 중국은 정말 크다고 실감했습니다.
Q. 배에선 남성뿐이었나요?
100% 남자였습니다.
Q.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출항 전 한국에서 면세 소주를 한 짝 사갔습니다. 제가 갑판 2였고, 계급상 제일 아래였죠. 어느 날 갑판장이 와서 소주 한 병을 양주 한 병과 바꾸자고 하더군요. 별생각 없이 바꿨는데 그 양주가 시바스 리갈 700ml였어요. 처음엔 이득 봤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엔 후회했습니다. 배를 오래 타다 보면 향수병이 오고, 그럴 때는 소주가 더 간절하거든요.
또, 외로울 때 갑판에 나가면 파도에 부딪힌 플랑크톤이 발광하면서 환상적인 색을 만들어냅니다. 나이트클럽의 네온 조명처럼, 때로는 녹색 불빛처럼 보였죠. 공해상에서는 별이 너무 많아 북두칠성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은하수도 보고, 별똥별에 소원도 빌었습니다만, 아직 이뤄진 건 없네요.
Q. 가족 관계는?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는 세 달 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 누나가 있습니다. 여동생 둘, 남동생 하나, 누나 하나, 총 5남매입니다.
Q. 가족 이야기에서 배우자나 자녀 이야기가 빠졌네요.
미혼입니다, 장가는 안 간 게 반, 못 간 게 반입니다. 자존심 상해서 '못 갔다'고는 안 하려 합니다.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놓쳤고,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Q.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스스로 확신이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데려와 함께 사는데,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도 있고, 가끔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남의 집 귀한 딸 데려와 고생 안 시킨 걸 다행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솔직히 외로울 때도 많습니다. 특히 친구나 선배들이 자식 장가 보냈다고 연락할 때면 더 그렇죠.
Q. 남동생은 결혼했나요?
네, 했습니다.
Q. 그럼 대는 이어졌네요.
뭐, 요즘은 그런 걸 따지지 않죠. 그래도 저까지는 가부장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릴 적 울산 향교에서 식사 예법 같은 책자가 집에 날아오기도 했어요. 그런 걸 보면 우리 집안이 양반 가문인가 싶기도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울산저널 가족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준비는 못 했지만, 진심으로 말씀드리자면 울산저널이 앞으로 더 발전해 하루에 한 번은 꼭 찾는 신문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진보 진영에서 유일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론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안에서만 이야기하지 말고, 대중을 향해 소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언론이 되길 바랍니다. 많은 분이 수고하시는 만큼, 판매량이 조금만 더 늘어나서 더 많은 독자와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가능한 한 열심히 돕겠습니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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