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억 집 가진 노인 "소득은 국민연금뿐, 생활비 걱정" [부동산에 묶인 빈곤 노년]

2025-08-20

서울 서대문구 박정식(69)씨는 45평형(전용 120㎡) 아파트를 갖고 있다. 10여 년 전 7억5000만원에 구입했는데 현재 시세가 15억원 선이다. 당시 2억5000만원을 대출 받았고 아직 1억4000만원 남았다. 박씨의 소득은 국민연금 250만원이 전부다. 여기서 대출 원리금(150만원), 집 관리비, 각종 공과금 등을 내면 쓸 수 있는 돈이 60만~70만원이다. 집·연금 때문에 기초연금 대상에 들지 못한다. 외식·여행을 끊었고 휴대폰 요금제를 6만원에서 4만원으로 낮췄다. 소득 기준으로 보면 빈곤층, 즉 하우스 푸어(House poor)에 다름없다.

소득 기준으론 빈곤층

박씨는 25평형(전용 59㎡)으로 집을 줄여 대출금 상환, 자녀 전세금 지원 등에 쓰고 남는 돈을 생계에 보태려 궁리했다. 하지만 포기했다. 25평형 집값이 만만치 않을 뿐더러 양도세·취득세·중개수수료·이사비 등이 부담스러웠다. 박씨는 “집을 확 줄여도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이 많지 않다”며 “노후를 위해 집을 활용하고 싶은데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노노 상속, 노노 자산잠김

초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노년층의 부동산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든든한 노후 버팀목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때로는 짐이 되기도 한다. 부동산을 팔거나 역모기지(주택연금)로 돌려서 유동화하는 게 쉽지 않다. 여기에다 끝까지 갖고 있다 사망하는 경우가 늘면서 60세 넘은 고령 자녀에게 상속된다. '노노(老老) 상속, 노노 자산 잠김'이 심화된다.

부동산의 29% 노인 손에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65세 이상 노인은 가구당 평균 5억1517만원의 자산을 갖고 있고, 이 중 부동산이 4억1278만원(80%)이다. 노인 가구(599만3354가구)의 부동산은 2474조원으로 전체(8488조원)의 29.2%이다. 증가 속도도 빠르다. 2020~2024년 노인 인구가 3.6%p 느는 동안 노인 부동산은 9.2%p 늘었다. 반면 30~50대 부동산은 2020년 3809조원에서 2022년 4831조원으로 늘었다가 지난해 4281조원으로 줄었다. 노인 5가구 중 3가구(363만 가구)가 부동산을 갖고 있다. 40대(261만 가구)나 50대(322만 가구)보다 많다.

권대중 서강대 일반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는 “현재 노인층은 중간에 일부 하락하기도 했지만 2000년대 초·중반과 2010년대 후반, 2020년 이후 코로나19 활황기 때 부동산을 많이 매입했다”고 말했다.

아파트 가장 안 파는 계층

노인 세대는 부동산을 쥐고 있다. 중앙일보가 법원 등기 정보 등을 분석했더니 지난해 아파트 소유자(전 연령층)의 6.7%가 판 것으로 집계됐다. 60세 이상은 5.7%로 가장 낮고, 30대는 8.9%로 가장 높다. 퇴직 후 부동산을 처분해 현금화 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 다르다.

집을 맡기고 매달 일정액의 현금을 받는 주택연금 가입률도 극히 저조하다.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주택연금 가입자(누적 기준)는 13만명이다. 평균 72세이고, 월 122만원의 연금을 받는다. 주택연금은 공시가격 12억원 이하 주택만 가입할 수 있다. 가입이 가능한 750만 가구의 1.8% 정도에 불과하다.

주택연금 돌리면 빈곤율 14.2%p↓

노인의 46.4%만 국민연금(노령연금)을 받고, 평균 연금이 68만원으로 많지 않은 편이다. 현금 수입은 적고, 상대적으로 부동산은 제법 있지만 잠겨 있다. 그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의 빈곤율(2023년 38.2%)로 이어진다. 이승희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지난 6월 KDI·한국은행 공동심포지엄에서 노인 부동산을 연금화하면 노인 빈곤율(2021년 기준)을 37.7%에서 23.5%로 낮출 수 있다고 밝혔다.

 반복돼온 부동산 가격 상승도 노인이 부동산을 놓지 못하게 한다. 더 오를 것이란 기대감에 팔지 않는 것이다. 부동산을 자녀에게 상속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황모(81·서울 양천구)씨는 상가 건물 두 채, 아파트 단지 내 상가, 충남의 땅 등을 보유한 60억원 대 자산가이다. 상가 한 채 지분의 절반이 둘째 아들 것이고, 나머지는 본인 재산이다. 연간 소득세 4000만원, 건강보험료 1000만원을 낸다. 상가 임대료 일부는 대학생 손자 학비로 지원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식(2명)에게 일찌감치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요즘 애들이 돈을 안 모은다. 사고방식이 나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애들이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하면 고민이야 하지. 하지만 내가 그런 얘기를 싫어하는 걸 알기 때문에 일절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녀가 50대 중후반이라 60세 넘어 상속될 가능성이 크다.

70세 넘어 상속 크게 증가

끝까지 보유하다 사망 후 상속하는 경우가 증가한다. 법원 등기정보에 따르면 70세 이상 피상속인(노부모)이 2020년 28만명(전체의 76.6%)에서 지난해 35만명(80.5%)으로 25% 증가했다. 신현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의료정책연구실장은 "재산을 일찍 물려주면 자식의 효도를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해 끝까지 보유하려는 경향이 커진다"고 말한다. 이재국 한국금융연수원 겸임교수는 “기대수명이 길어지면서 마지막 보루로 삼고 있는 부동산을 끝까지 갖고 있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부동산 상속받은 이의 44% 고령 자녀

상속된 부동산도 젊은 층으로 가지 못하고 노년층에서 맴돈다. '노노 상속'이다. 지난해 부동산을 상속 받은 사람(74만5000명)의 44%(32만5000명)가 60세 이상이다. 증여도 마찬가지로 증여하는 증여인, 증여 받는 수증인 모두 고령화하고 있다. 70세 이상 증여인 비율이 2020년 44.8%에서 지난해 49.3%로, 수증인은 20.6%에서 29.5%로 상승했다.

함영진 우리은행 부동산리서치랩장는 “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젊은 층으로 부동산이 이전되지 못해 젊은 층의 내집 마련 등 부동산 수요를 줄이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90대 부모의 주택이 집 있는 60대에게 상속되는 식이다.

노노상속이나 노노증여가 경제 활성화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본처럼 조부모가 손자 교육비 등으로 증여하면 세 부담을 줄여줄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자녀 결혼·출산 때 증여세를 완화한 것처럼 조손 증여를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주택연금 가입 기준 완화해야

노년층의 부동산을 유동화할 수 있는 길도 터줘야 한다. 거주와 수입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주택연금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황인도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금융통화연구실장은 “설문조사 결과 전국 55~79세 주택 보유자 35%가 주택연금 이용 의향이 있는 잠재 수요로 나타났다”며 “모두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실질 GDP(국내총생산)가 0.5~0.7% 증가하고 34만명이 노인 빈곤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실질 GDP 0.7%이면 지난해 기준으로 16조원에 해당한다.

정혜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주택연금의 노후소득보장 역할 강화를 위한 제언 보고서’에서 “주택연금은 안정적 노후생활소득과 주거 안정을 확보하고 거시경제 측면에서 고령자들의 소비 역량을 제고할 수 있다”며 “공시가격 기준(12억원)을 올리고 일정한 주기로 주택 가격 변동을 반영해 월 수령액을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주택 크기 줄이기 지원 필요

널찍한 고령자 주택의 ‘다운사이징’(크기 줄이기) 지원도 필요하다. 60세 이상 주택 소유자 4명 중 1명의 집이 국민주택 규모(전용 85㎡)보다 큰 100㎡ 초과다. 다운사이징은 주택 크기 조정에 따른 차액을 현금화할 수 있고, 줄인 주택은 나중에 증여하거나 상속할 수 있다. 정윤영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주택을 줄일 때 취득세 등에 세제 혜택을 줘 다운사이징을 활성화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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