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길에서 또 마주친 검은 고양이. 벌써 며칠째다. 아직은 어린 티가 나는 초록색 눈동자의 검은 고양이. 꽤 날렵하고 예쁘다. 안녕, 초록눈! 나도 반가워 손을 흔들자, 내 앞으로 다가와 앞발을 쭉 뻗는다. 몇 번 마주쳤다고 고양이도 나를 아는 걸까? 신기할 정도로 친밀감을 드러내며 발랑 눕기도 하고 내 다리에 제 몸을 비벼대기도 한다. 어린 고양이는 대부분 다가가면 도망치기 일쑨데. 혹 고양이는 집사를 자신이 고른다던데… 나를 집사로 점찍은 것인가? 안 돼!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고양이 집사가 되긴 싫어! 그러니 미안, 미안하지만, 제발 그런 생각만은 하지 말아다오.

약간 매정하게 고양이를 떼어놓고 돌아서면서 문득 미국의 전설적인 시인 찰스 부코스키가 떠올랐다. 그는 길가에 버려진 아홉 마리의 고양이를 거두어 키우며 시집 두 권 분량의 고양이 시를 썼다. 아마도 부코스키만큼 고양이 시를 많이 쓴 작가도 없으리라. 산문은 많이들 썼지만. 그중 우리나라에 번역된 ‘고양이에 대하여’를 읽으며 마치 고양이를 자신의 친구나 동료처럼 대하며 어찌나 잘 놀아주고, 잘 관찰하고, 많은 위안을 주고받는지, 딱히 고양이에 큰 관심이 없는 내 눈에도 부코스키와 고양이라는 두 야성, 두 건달이 서로 애정 나누기 대결을 하는 듯 키득키득, 하하하, 흑흑흑, 신나게 눈물 나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아주 잠깐, 나도 고양이를 한 번 키워 볼까? 살짝 호기심을 느낀 적은 있지만, 아무래도 누군가를 책임질 자신감이 없어 바로 철회했다. 대신 나는 만나는 고양이마다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직접 고양이에게 들은 건 아니지만 고양이들은 자신을 야옹아! 고양아! 라고 부르는 걸 아주 싫어한단다. 하여 T S 엘리엇의 동시집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이 동시집은 불멸의 뮤지컬이 된 ‘캣츠’의 원작품이다)’에서처럼 나도 만나는 고양이마다 재미나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그것도 엘리엇이 말한 것처럼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름 붙이기만으로도 모두와 친해진다면 그건 즐겁고 재미있는 일. 하루는 꽃 이름, 하루는 작가들 이름, 하루는 예쁜 단어들로 번갈아 불러주면 되는 일. 부르는 내 목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이 뒤돌아보거나 빤히 쳐다볼 때의 그 순간의 전율! 빨아들이듯이 빨려들 것 같이 강렬한 그 눈빛들! 약간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그 순간이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언젠가 읽은 작자 미상의 시를 자꾸만 떠올리게 돼. “고양이가 눈을 뜨네./태양이 들어갔네./고양이가 눈을 감네./태양이 머물러 있네.//밤에/고양이가 잠에서 깨어나면/난 어둠 속에서 두 개의 태양을 보네.”라는.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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