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임은 그대로 남았다

2025-05-27

중견 배우 훌리오는 친구이자 감독인 미겔의 신작 ‘작별의 눈빛’을 촬영하던 중 사라진다. 바닷가에 신발만 남기고 그야말로 자취를 감췄다. 혹자는 나이 듦을 받아들이지 못해 생을 끊었을 거라고, 다른 누구는 알코올 의존증이 심해져 취중에 낙상했을 거라고 한다. 배우의 실종으로 인해 제작은 중단되고 영화는 미완으로 남는다.

그로부터 22년이 흘러 사건을 다룬 탐사보도가 방영된 후 제보가 들어온다. 미겔은 제보자가 알려준 대로 수녀원 부속 요양원에 찾아가, 이름과 과거를 잃어버린 채 요양원 잡부로 살아가는 옛 동료를 마주한다. 그는 훌리오의 기억을 찾아주고자 해군 복무 시절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그때 배운 매듭 묶기를 시연한다. 사실상 의절한 딸과 만남도 주선한다. 훌리오는 그중 무엇도, 딸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꼭 한번, 자신이 흥얼거리던 노래를 미겔이 이어 부르며 둘의 노랫소리가 포개지자 무언가 건드려진 듯한 눈빛을 내보인다.

기억을 깨울 마지막 방안으로 미겔은 미완의 ‘작별의 눈빛’을 친구 앞에서 초연한다. 작중 사설탐정으로 분한 훌리오는 죽어가던 노인의 청으로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을 찾아 데려온다. 딸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부정하나, 유년기에 그에게서 배운 노래는 따라 부른다. 부녀의 노랫소리가 포개지는 순간 비로소 알았다. 훌리오는 노래 자체, 혹은 그걸 함께 불렀던 절친과의 과거 한때를 기억해낸 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연기한 인물이 작중 상황에서 품었던 감흥과 감동을 제 것으로 간직해 이와 유사한 상황에 반응했던 거다.

기억이 휘발된 후에도 예술이 만들어낸 일렁임은 그대로 남았다. 훌리오는 형언하지 못할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하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빅토르 에리세, 2024)는 거기서 맺는다.

“설령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 해도요. 톰 웨이츠의 노래를 한 번 더 듣기 위해 살아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저라면 그럴 것 같아요.” 언젠가 숲속 오솔길을 걷다 지인의 질문에 답하고 이내 아차 싶었다. 톰 웨이츠 버전의 ‘월칭 마틸다(Waltzing Matilda)’에 닿은 것은 고작 하루 전, 바로 그 지인을 통해서였으니까. 음악을 깊게 아는 사람이 공들여 고른 곡을 두고 저렇게 말하다니. 타인의 보물상자에 손댄 듯 미안했다. 그렇지만 허언은 아니었다. 이따금 어떤 음악을 들을 때면 살아 있어서, 내가 다른 누가 아닌 나여서 좋았다. 그 노래를 듣고도 그랬다.

그는 음악 말고도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 몇달간 두고 마실 물을 옮겨주고, 진한 커피 끓일 도구와 터키식 스튜를 사주고, 사람과 사물을 세심히 살피는 시선을 가르쳐줬다. 반면 난 예쁘게 깎을 줄 모르는 게 부끄러워 미리 사둔 과일조차 손님의 탁자에 내놓지 못했고,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고자 아무 말이나 던졌고, 그런 자신을 미워하느라 정작 상대의 마음은 살피지 못했다. 만회하고픈 조바심과 잘못한 게 더 있나 하는 불안, 근거 없는 추정에서 비롯된 절망이 꼬리를 물었다.

적당한 거리의 사회적 관계에서 난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희소하고 각별하고 귀한 관계에선 어느 지점에 이르면 태엽 장치처럼 저렇게 되었다. 타인이 미운 경우와 달리 이 경우 거리 두기가 가능하지 않았다. 스스로와 절연하는 방법은 죽음 외엔 없었다.

어쩌면 이게 삶의 전부일까. 자책감의 긴 터널 하나를 빠져나올 무렵 또 다른 자책감의 동굴로 들어가는. 그렇게 터널과 동굴을 몇개 지나오면 노쇠한 내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질까.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건 안다. 아름다운 이가 알려주었던 아름다운 노래는 내가 나를 버리고 싶던 순간에마저 여일하게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은 뼈와 피에 각인되어 남으리란 것. 그러니 동굴 안일지라도 단잠 자고, 내일 일어나 내일 몫의 숙제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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