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10여 년 만에 혁신형 국가의 선두에 오른 비결은

트럼프가 상호관세 구상을 발표한 4월 2일 이후 지속되었던 우려와 긴장이 7월 31일의 극적 합의로 사라졌나 싶더니, 합의 이행이 지연되면서 다시 걱정이 쌓이고 있다. 특히 일본이 5500억 달러 투자계획을 전적으로 미국 정부에 맡기고, 이익도 대부분 미국이 갖는 조건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우리가 약속한 3500억 달러 투자의 내용은 어떻게 될지 우려도 커지고 있다.
러트닉 상무장관은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으로부터 얻어낸 투자 약속을 이용하여 ‘국가경제안보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히면서, “세계의 성공에는 강력한 미국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국가들의 약속을 활용”한다고 표현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단순히 동맹의 팔을 비튼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중국을 의식한 발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껏 미국이 하던 방식으로는 중국을 견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무역수지와 재정의 막대한 적자 상황에서 동맹의 자금이라도 받아서 산업정책에 나서겠다는 고백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행동을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산업정책 현주소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트럼프를 이해하고 예측하려면 중국의 산업정책부터 파악해야
금융위기 이후 산업정책 본격화한 중국, 위기 끝나도 개입 유지
범용 기술과 전략 분야 선정해 지원하되 시장 이용해 경쟁 촉진
정부 주도 기금 2126개, 약정액은 GDP 10%인 1조8000억 달러
중국 산업정책의 변화 과정
중국이 항상 정부 개입과 산업정책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에 이는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1978년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한 이래 약 30년 동안 중국의 경제발전을 이룬 힘은 산업정책이 아니라 시장과 경쟁이다.
중국 정부가 1978년 이후 곧바로 시장 개입을 줄이지는 않았다. 다만, 마오쩌둥 시대부터 이어진 10개년 계획은 물론 3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대부분 현실 예측에 실패하고 중도 폐기되고 말았는데 정부가 예측,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시장화된 경제가 빨리 성장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 억눌렸던 경제활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국유기업 개혁, 도농 간 이주장벽 철폐, 주택 사유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이 이 흐름을 가속하였다. 중국 정부도 이에 적응하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은 경제개발 계획이 유명무실화되고 정책적 개입은 최소화되었다.
이런 흐름은 2000년대 중반 들어 다시 변화하였다. 중국 경제 전문가 배리 노턴(Barry Naughton)에 의하면 중국 산업정책이 부활한 시점은 2006년 발표된 ‘국가 중장기 과학기술 발전계획(2006~2020)’부터로 볼 수 있다. 당시 원자바오 총리가 새로 들어선 걸 제외하면 훗날 ‘중국제조 2025’의 토대가 되었다고도 볼 이 계획에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내용과 범위 역시 소규모에 그쳤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각국이 앞다투어 경기부양책을 사용하는 가운데 중국 정부 역시 시장 개입을 크게 확대하였다. 이 경험은 정부가 시장경제를 보완해야 한다는 믿음을 키웠고, 경기 회복 후 이전으로 돌아간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정부 개입을 더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0년 이후가 되자 중국의 산업정책은 전례 없이 강화되고 적극적으로 되었다. 2015년에 ‘중국제조 2025’와 ‘인터넷플러스’ 정책에 이어, 2016년 ‘혁신주도형 발전전략’을 발표하며 정점을 이루었다. 이들을 통해 2020년에 혁신형 국가의 대열에 진입하고, 2030년에는 그 중 선두권에 오르며, 건국 100주년인 2049년에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혁신 강국이 되겠다는 목표가 제시됐다.
말로야 언제든 거창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낮은 비용과 풍부한 노동력으로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이지만, 조잡한 품질의 공산품을 생산하며 선진국 기술 배우기에 급급하던 중국이 10여 년 만에 혁신형 국가의 선두권에 오르겠다니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특히 국가가 계획하고 간섭하는 방식으로는 아무리 물량 공세를 퍼붓고 인재를 육성해도 창의와 혁신으로는 이어지지 못할 거라는 비아냥 섞인 조언도 적지 않았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중국의 계획대로 가고 있으며, 심지어 초과 달성한 부분도 많음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전기차·배터리·태양광 등 신에너지 및 친환경 산업,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로봇, 통신, 우주·항공 및 양자 기술 등에서 첨단 경쟁 중이며, 많은 분야에서 우리를 앞서 미국과도 겨루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여전히 막강한 제조업 생산능력과의 결합까지 고려하면 미국과 서방세계가 느끼는 위협은 엄청나다.
중국의 ‘정부 주도 시장경제’
중국이 어떻게 이렇게 단시간에 발전하였는지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특히 경제가 성장할수록 시장과 민간 주도로 이행해야 한다는 기존의 믿음과 역행한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서방세계의 일차적 반응은 중국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칙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기술과 인재를 몰래 빼내고, 환율을 조작하며, 국내기업에는 보조금을 지급하고 외국기업에는 무역장벽을 세우는 등의 행위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중국의 약진을 설명하기 어렵다.
2006년 이후 중국의 산업정책은 매우 정교한 계획을 세우면서도 시장원리를 결합했다는 특징이 있다. 중국이 신재생에너지나 AI, 자율주행, 로봇 등에서 앞서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술적 리더십이 아직 불분명하고, 기존 선진국에 확고한 선도기업이 없는 신흥분야와 더불어, 특정 산업보다는 모든 생산을 혁신하고 광범위한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 위주로 선택해 밀어줬다. 기술개발만 지원한 게 아니라 원자재부터 최종 수요의 창출에 이르기까지 가치사슬 전반을 연결하는 투자 및 비전 제시가 이루어졌다.

시장원리의 핵심은 경쟁을 통해 생산성이 높은 곳이 드러나고 자원이 배분되게 하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전략 분야를 선정하여 밀어준 것은 시장의 왜곡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시장을 이용하고 경쟁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특히 ‘정부인도기금’이라는 투자 펀드를 대규모로 다수 조성하고 운용을 민간에 맡겼다.
이런 형태의 펀드는 새로운 개념은 아니지만, 차이점은 국가자산 동원 규모가 훨씬 크고, 목적성이 강하며, 스타트업뿐 아니라 대규모 인프라 구축에까지 투입된다는 점이다. 2024년 8월 기준 중국에 설립된 정부주도기금은 2126개이고, 약정액은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10%에 이르는 13조 위안(약 1조8000억 달러)이다.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정부가 약정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고민 없이 전략 육성 분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중국 산업정책의 또 하나 독특한 점은 진입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규모 정부 지원은 과잉 진입과 중복투자로 이어지기 쉽다. 중국 정부는 이를 사전적으로 피하려 하기보다는 지원은 넓게 하되 경쟁으로 승자를 가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기업이 한정된 정부 지원을 따내려는 노력보다는 성과의 창출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정부 개입의 왜곡을 줄이는 역할을 했다.
물론 이런 물량 공세식 정책은 끝없이 이어지기 어렵다. 부동산 버블 붕괴와 부채 누적 문제를 겪는 중국 정부는 이미 구조조정과 속도 조절에 나선 상태다. 첨단 반도체, 상업 항공기, 의료기기 등 당초 목표에 미달한 분야도 있고, 성공한 분야도 효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2024년에 발표된 ‘신질생산력’ 전략을 보면 정부의 강력한 주도로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접근에서 후퇴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도 새로운 차원의 산업정책을
거침없이 나아가는 중국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미국과 트럼프는 이미 답을 낸 셈이다. 더 이상 점잖음이나 국제적 위신은 생각지 않고 힘으로 자국에 자원을 집중시키고, 중국식 방법론을 동원해서라도 경쟁력을 높인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우리다. 거의 모든 주력산업이 중국과 겹치고 미래 경쟁력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마저 우리에 청구서를 내미는 상황에서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분명한 점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고의 변화와 치밀한 전략에 따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각국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회를 찾는 정보수집 능력도 강화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야말로 새로운 차원의 국가 주도 산업정책 기능 부활이 필요한 시점일 수 있다.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