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계 25시

2000년대 초, 경인남부지역 소규모 바의 여사장들 사이에선 ‘빨간모자’를 쓴 손님은 받지 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2인조인지, 단독범인지 정체는 몰라도 영업시간 막바지인 새벽 시간에 불쑥 찾아와 카운터에 혼자 남은 여사장을 다짜고짜 겁탈한 뒤 가방을 털어 수표와 현금을 갖고 달아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보는 피해자가 등장하지 않는 한 막간의 가십거리로 치부되기 일쑤고, 실제로 경각심을 갖는다 해도 다소간 신중해지는 수준에 그친다. 그마저도 상승 곡선을 그렸다가 시간이 갈수록 완만해지며 빨간모자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 돼 버린다.
또한 소문이 무섭다고 월 소득의 20%를 떼가는 민간 경호원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며, 당시 시대 상황에 보안 카메라를 입구에 다는 건 보기 드물었다. 거기에다 발 없는 소문이 천 리를 간다지만 바를 운영하는 여사장 모두가 지역 사정을 꿰고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 일부는 뜯긴 것도 몇십만원 정도의 소액이고, 수치심 때문에라도 입을 다무는 터다.
그러던 2004년 12월 2일 새벽 3시, 인천시 주안동의 한 주점에서 강도강간 피해 신고가 접수됐다. 피해자는 35세의 여사장이다. 진술을 들어보니 반곱슬머리에 눈매가 사나운 남성이 오후 9시에 들어와 혼자 술을 마시다가 나갔다. 하지만 인적이 끊긴 새벽 2시에 돌아와 식칼로 자신을 위협하며 33만원을 빼앗고 성폭행했다는 얘기다. 그러고는 카운터를 닦는 물수건으로 자신의 손이 닿은 컵이나 테이블을 훔치고 피해자의 몸까지 닦아낸 뒤 도주했다고 한다.
좀 전까지 겪어선 안 되는 범죄를 당한 나머지 피해자의 정신은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범인의 인상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라는 경관의 말에 그녀는 짧게 답했다.
“빨간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점퍼 안의 상의도 빨간색이었고.”
사실 인천의 강력팀 형사들은 ‘빨간모자’에 점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최근 몇 달 동안 강도강간 사건이 늘었고 피해자들의 진술도 비슷했지만 자기 관내에서 확보된 증거만으로는 범인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타 지역 경찰서와 정보를 공유한다면 실마리가 나올 법도 했으나 공조수사 가능성은 요원했다. 남의 사건을 들춰본다는 건 곧 경찰서 간의 자존심 문제로 비화된다. 굳이 일을 키워서 알력다툼이 벌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그렇게 빨간모자 사건은 각 경찰서 지하 창고에 미제사건 서류로 쌓여만 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5년 2월 22일 새벽, 인천시경 광역수사대(이하 ‘광수대’) 강력1팀 사무실에 무전이 울렸다. 미추홀구 한 다방에서 강도강간 사건이 벌어졌다는 긴급 보고로, 홍승만 강력1팀장이 현장에 출동하자 여주인과 종업원은 빨간모자를 쓴 20대 후반의 남자에게 당했다고 진술했다. 그 밖의 인상착의는 170㎝의 중키에 눈매가 찢어졌으며 얼굴형은 둥그스름하다고 했다. 빨간모자 사건 용의자 몽타주와 그대로 일치했다.
이튿날 수사대책보고 회의에서 박광현 인천시경 청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최근 우리 지역에 강도강간 사건이 늘고 있는데 각 경찰서의 보고서를 취합하면 누가 봐도 동일범에 의한 연쇄 사건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검거는커녕 공조도 못 해서 용의자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게 말이 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