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리는 단언하지 않는 편이 좋다

2025-11-13

‘모든 것은 거짓이다’라는 말에는 그 말조차 거짓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아무것도 참이 아니다’라는 말도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 독단주의자는 자신의 주장이 참이라고 단정하는 반면, 피론주의자는 자기주장조차 스스로 검열하여 독단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삶의 진리는 단언하지 않는 편이 좋다』 중에서.

얼마 전 제주 여행 중 동네 작은 독립서점에서 골라든 책이다. 고대 회의주의(피론주의) 전통을 집대성한 그리스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저작을 축약 번역했다. 철학자 피론(사진)의 이름을 딴 ‘피론주의’는 서양철학에서, ‘모른다’는 겸허한 자세로 판단을 유보하는 ‘에포케’ 정신으로 이어졌다. 그럴 때야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고 봤다. 피론주의는 중세 암흑기를 지나 근대 초기 회의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피론은 라파엘로의 유명한 그림 ‘아테네 학당’에도 나온다. 화면 중앙에서 대화 중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와 달리 한 구석에 홀로 구부정하게 서 있는 사람이 피론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을 따라간 그는 인도의 금욕주의 수행자들의 절제와 평정에 감화받으며 회의주의적 태도에 눈떴다. 다른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적 진리를 찾아 열변을 토할 때 그는 오히려 진리라는 개념이 인간의 불안을 낳는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피론주의는 자칫 결정 장애나 현실회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자 서미석은 서문에서 “피론주의는 무능의 철학도 냉소의 도피처도 아니다. 이 전통이 강조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언제나 열린 태도로 자기 견해에 깊은 의심을 품는 것이다. (…) 회의적 태도는 실질적인 사회적 관용과 사유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고 썼다. 각자의 확신을 절대적 교리처럼 여기며 분열하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적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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