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로부터 나에게 다가왔다

2025-11-13

출간 전에는 상상도 못했으면서 책을 보자마자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하게 되는 책이 있다. 지금까지 왜 이런 책이 없었나를 출간 이후에야 한탄하게 되는 책 말이다. 이번에 나온 <발달장애 당사자연구>(EM실천)가 그렇다.

이 책을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전망이 밝지 않다. 자폐스펙트럼 장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책 제목은 연구기관에서 발간하는 보고서 같고 출판사 이름도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다. 그래서 더욱 알리고 싶다.

책에 담긴 메시지가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자폐인이 자기 몸과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고 인식하는지 그리고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감각과 인식, 관계 맺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당사자연구’라는 형식 자체가 앎과 해방에 관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당사자연구는 일본의 정신장애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지체(肢體)장애인이나 뇌성마비장애인의 경우 장애가 가시적이며 사회 환경에서 개선해야 할 점 또한 상대적으로 잘 보인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이나 자폐인들은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환경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당사자로서도 알기 어렵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의 정체는 무엇인가. 당사자연구는 장애인 당사자가 동료들과 자신들의 체험을 분석하고 그 앎을 사람들과 공유해나가는 작업이다. 사회를 바꾸기 전에 자기 앎을 확보하고, 이 앎을 통해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인 아야야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통상적으로 자폐인은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인으로 분류된다. 자기 세계에 갇혀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 말이다. 하지만 아야야의 말대로 불통이 어느 일방의 문제일 수는 없다. 소통 불가능이 본성인 존재가 있다니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자폐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폐인은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해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야야에게는 몸 안팎의 모든 자극이 똑같이 생생하다. 그래서 특정 감각을 간추려내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배고픔 같은 것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배고픔과 관련된 자극들(머리가 어지럽고 위 부근이 꺼진다)만큼이나 그와 무관한 자극들(머리를 감지 못해 가렵다)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야야에게는 각각의 존재들이 고화질 사진처럼 방대한 정보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기억에 저장된 이미지들도 그렇다. 과거의 것인데도 너무나 선명하게 재생되어 지금 일어나는 일과 뒤섞일 정도다. 본인이 원치 않아도 타인의 행동이 자기 안에서 재생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타인의 캐릭터까지 몸에 옮겨붙어 자기 캐릭터를 잃어버리는 일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사람의 결함이나 증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 세상에 관한 어떤 체험에 대한 이야기다. 아야야는 미세한 차이까지 선명하게 포착하고 기억하는 사람이다. 각각의 사물이 모두 고유한 질감을 갖는다. 그에게는 눈앞의 장미가 그냥 장미가 아니라 저마다 고유한 장미인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량의 자극과 감각을 간추리고 의미와 행동을 정립해갈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지금의 사회 환경이 그에게 얼마나 힘들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과 난무하는 이미지들, 모두가 서로를 향해 서두르라고 닦달하고 윽박지르는 사회에서 그가 얼어붙고 패닉에 빠지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것이 이상하지 않은 만큼 우리의 감각과 인식, 무엇보다 우리 삶의 방식이 조금은 이상하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메시지. 아야야는 오랜 세월 ‘사람과 이어지고 싶지만 이어질 수 없어’라고 생각해온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사람과 이어지는 것’에 대한 동경을 잃어본 적이 없다. 무언가와 이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식물과 하늘, 달에 대해 그는 그런 기쁨을 자주 느낀다. 그런데 지금 환경에서 사람과 이어지는 일은 너무 어렵다. 그 길을 열기 위해 스스로를 연구한 것이 이 책이다. 그냥 덥석 손을 잡아달라는 게 아니다. 이 책의 일본어판 부제는 “천천히, 신중하게 이어지고 싶다”이다. 나는 이것이 존재가 존재에게 다가가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당사자연구를 통해 그는 그로부터 나에게 천천히, 신중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내가 나로부터 그에게 천천히, 신중하게 다가갈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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