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침스틸러] 선홍빛 속살, 입에 착 감기는 쫀득함…魚따~ 이맛이제

2025-05-22

육지에서 뱃길로 97㎞ 남짓. 멀리서 바라보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는 섬 흑산도(黑山島).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된 조선의 실학자 정약전은 이 섬에서 해양생물학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집필했다. 생물의 생김새만이 아니라 습성과 조리법, 섬사람들의 삶까지 2만3022자로 담아냈다. 그가 무린류(비늘이 없는 어류)의 첫 어종으로 기록한 건 다름 아닌 흑산도의 참홍어였다.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 2021)는 호기심 많은 선비 정약전과 바다에 관해선 모르는 게 없는 청년 어부 창대가 신분을 넘어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제이자 벗이 돼가는 여정을 그린다.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됐다. 수묵화 같은 영상미는 섬의 풍광과 시대 배경을 몰입감 있게 표현하고, 그 속에 등장하는 홍어회의 맛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유배지에 막 도착한 정약전 앞에 놓인 건 탱글탱글한 생홍어회 한접시. “대역죄인한테 너무 잘해주지 말라”는 별장(別將)의 말에도 그를 살뜰히 챙기는 가거댁(가거도에서 시집 온 과부)은 흑산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삭히지 않은 싱싱한 홍어회를 대접한다.

“홍어는 원래 생물이 진짠디요. 여기서 나주까지 싣고 가는 사이에 기냥 푹 삭아져버리니께 육지 사람들은 이 맛을 알 수가 없지라.”

정약전은 가거댁의 집에 머물며 흑산도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직접 보고 듣고 묻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그는 흑산도를 새로운 탐구의 장으로 삼았다.

“둘(홍어와 가오리) 다 큰 놈은 너비가 예닐곱자에 암놈이 크고 수놈이 작은디, 홍어는 코가 뾰족하고 가오리는 넓적하고. 빛깔도 쪼매 다른디요. (중략) 물고기를 알아야 물고기를 잡응께요. 홍어가 가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가 가는 길은 가오리가 알지라.”

마을에서 만난 어부 창대는 바다를 꿰뚫는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이에 감탄한 정약전은 어업으로 먹고사는 이들이 어떤 물고기를 잡고 어떻게 손질하는지,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간다. 어두운 섬 ‘흑산’은 그렇게 깊은 지식의 터 ‘자산’으로 바뀐다.

생물 홍어 한점 맛보기 위해 12일 흑산도행 배에 올랐다. 전남 신안의 1000여개 크고 작은 섬 중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흑산도는 날씨가 맑은 날 KTX로 서울에서 목포까지 3시간,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또 2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겨우 닿는다.

넘실대는 파도에 진이 빠질 때쯤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후박나무·동백나무·소나무 등의 상록수가 이 섬의 짙은 푸르름을 만들고 있었다. 섬 바람을 맞으며 배에서 내렸다. 선착장을 빠져나와 둘러보니 과연 우리나라 홍어 주산지다. 흑산시장 먹거리촌과 ‘아시아’ ‘뉴월드’ ‘코리아’ 같은 이름을 단 민박집 일층엔 대부분 홍어 중매인이 운영하는 홍어전문점이 있었다. 매년 5월이면 홍어 축제도 열린다. 한 택시 기사는 축제 플래카드를 가리키며 “이날 관광객 티 내지 말고 친척 집 놀러 온 척 후줄근하게 입고 돌아다녀보라”며 “운 좋으면 홍어 한접시 공짜로 얻어먹을 수도 있다”고 농담을 건넸다.

시장 초입에 있는 식당 ‘싱글벙글’에서 홍어회를 주문했다. 육지에서 홍어회라 하면 삭힌 홍어에 돼지고기와 묵은지를 삼합으로 먹는 게 흔하지만, 신선한 홍어가 있는 흑산도엔 ‘안 삭힌 생물 홍어회’라는 특별한 선택지가 있다.

“안 삭힌 생물 홍어회는 잡은 뒤 일주일 정도 냉장 보관 후 썰어서 나가요. 숙성하지 않고 바로 먹으면 살에 물이 많아 흐물흐물하고, 수분을 빼야 식감이 찰져요. 제법 크죠? 8.3㎏ 이상인 1번치 홍어 한마리면 20명도 거뜬히 나눠 먹어요.”

사장 정현씨는 9일에 잡힌 3번치 6.6㎏ 암컷 홍어를 손질하며 말했다. 홍어 앞에 흑산이 붙으면 맛도 값도 달라진다. 한때는 외국산을 흑산도산으로 둔갑시켜 속여 파는 일도 많았지만, 지금은 생산정보를 담은 QR 태그를 홍어 코에 부착해 정품 흑산 홍어임을 인증한다.

선홍빛 생물 홍어회 한접시가 나왔다. 이처럼 홍어 살은 원래 붉은색을 띠고 삭힐수록 연갈색으로 변한다. 정 사장은 “생홍어회는 곁들임 없이 초장이나 기름장에 찍어 먹는 게 가장 맛있다”고 귀띔했다. 처음 보는 홍어회 모습에 정약전처럼 맛을 기록하며 먹고 싶어진다.

날개·코·볼살·애·뱃살 등 부위별로 하나하나 음미해본다. 큼직이 썬 날개살은 입천장에 달라붙을 정도로 쫀득하고 감칠맛이 풍부하다. 톡 쏘는 맛은 없지만 깊은 곳에서 암모니아향이 은은하게 맴돈다. 한점 먹을 때마다 오독오독 뼈를 씹는 재미도 있다. 볼살은 홍어 머리 양옆에 붙은 작은 부위로 매우 귀하다. 부드럽고 담백하다. 뱃살은 쫀득한 식감으로 특히 맛있는 부위로 꼽힌다. 한편 애와 코는 삭히면 향이 강렬해 홍어 마니아가 아니면 선뜻 도전하기 어려운 부위지만 생물은 오히려 고소하고 쫄깃한 매력이 있다. 인심 좋은 정 사장이 방금 잡아 수분이 빠지지 않은 홍어도 맛보라며 몇 점 내어준다. 수분을 머금은 생물 홍어는 살이 물러 부드럽지만 특유의 감칠맛이 부족하고 뼈가 단단해 먹기 어렵다.

영화 속 정약전은 “벗을 깊이 알면 내가 깊어진다”고 말한다. 흑산도 생홍어회 한점을 입에 넣으며 그가 섬과 어민들을 바라보던 존중과 탐구의 시선을 상상해본다. 홍어를 외딴섬의 단순한 별미가 아닌 자연과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 생각하니, 그 맛이 더욱 깊게 남을 듯하다.

신안=김보경 기자 bright@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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