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사로잡은 이욱 詩 '우미인'…아버지는 못마땅해 했다 [왕겅우 회고록 (28)]

2025-12-13

부모님과의 5개월 / Five Months with My Parents

말라야를 떠나 난징으로 향할 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는 내 기억에 없다. 부모님이 오랫동안 귀국을 기다려 오셨고 중국에서의 내 공부를 계획해주신 것으로 보아 충실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내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생각은 아버지의 대학이 그곳에 있다는 것과 그곳이 삼국시대의 오나라 이래 중국의 수도로서 18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라는 것이었다.

소년 시절의 나는 대개의 사람들처럼 유비, 관우, 장비의 세 영웅이 이끌고 위대한 전략가 제갈량이 다스리던 촉나라에 더 마음을 두었지만, 난징에 가보고는 그곳의 중요성을 알아본 오나라 군주들에게 더 점수를 주게 되었다. 난징은 남북조시대를 통해 3백 년 이상 수도 노릇을 했고, 1368-1912년의 명-청 시대에 양대 수도의 하나였다. 그리고 국민당정부는 1928년의 집권 이후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그렇다 해서 그 도시에서 무엇을 찾아볼지 생각해둔 것은 아니었다. 저명한 시인들과 관련된 장소들이 있었고, 훌륭한 관리와 용감한 장수들의 업적을 떠올려주는 곳들이 있었다. 태평천국에 관한 끔찍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난징을 수도로 삼으면서 선비 가문들을 학살하고 청나라 토벌군에게 잡혀 죽기 전에 저희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그 지도자들 이야기다.

과거시험 응시자들은 공자묘 일대에 묵었는데, 목적이 시험 준비에 있다고 해도 동네에 바글대는 기생과 광대가 공부 외의 다른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조정 문화와 선비 문화를 조금씩이라도 맛볼 수 있도록 학교 친구들이 온갖 곳에 데려다주었고, 그 결과 나는 중국의 현대화를 위해 과거와 현재를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난징 도시와 관계된 시 작품에 마음이 많이 끌렸다. 아버지가 읽도록 권하신 당시(唐詩) 중에는 옛 도성의 흘러간 영화를 그린 것, 옛 선비들의 삶을 수놓은 만남과 헤어짐을 다룬 것이 많았다. 이백(李白)의 작품에는 취중의 분방함이 곁들여져 흥을 돋워주었다. 그러나 난징과 관련된 시로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작품은 당시가 아니었다. 한 친구가 짚어준 그 작품은 난징에 수도를 둔 남당(南唐) 황제 이욱(李煜)의 아름다운 사(詞) “우미인(虞美人)”이었다. 이욱은 975년 송나라에 항복했다가 후에 자살을 강요당했다. 그 작품의 번역 몇 가지를 근년에 보았는데, 양셴이(楊憲益)와 그 부인 글래디스의 번역이 특히 마음에 든다. 난징 함락에 대한 내 소감을 되살려준다.

꽃피는 봄과 달빛 비치는 가을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 春花秋月何时了

지나간 일은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구나. / 往事知多少

지난밤 누각에 동풍이 다시 불어오는데, / 小楼昨夜又东风

옛 나라 그리움을 이길 수 없어 달빛에서 고개를 돌렸다. / 故国不堪回首月明中

난간과 주렴은 예전 그대로인데, / 雕栏玉砌应犹在

분 바른 얼굴만이 바뀌었구나. / 只是朱颜改

묻노니, 슬픔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가? / 问君能有几多愁

봄철의 한 줄기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도다. / 恰似一江春水向东流

작자는 난징에서 2천 리나 북쪽으로 떨어진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에 묶여 있으면서 자신을 압도하는 상실감과 함께 난징 생활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린 것이다.

[역주: 907년 당 멸망에서 979년 송 재통일 사이의 본열기를 “5대 10국”이라 한다. “5대”란 북중국에 자리 잡고 번갈아 “황제”를 칭한 다섯 왕조를 말하는 것이고 “10국”이란 그 기간에 남방에서 일어난 크고작은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남당은 10국 중 가장 큰 국세를 이루고 한때 황제를 칭하기도 했으나 제3대 군주인 이욱은 “당”이란 국호를 버리고 “강남국주(江南國主)”로 자칭했다. 2대 군주 이경(李璟)과 3대 군주 이욱을 비롯한 뛰어난 사(詞) 작가들이 나와서 문학사에서 “남당사(南唐詞)”를 하나의 중요한 조류로 평가한다.]

아버지가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상실감과 절망감의 표현을 못마땅해하는 유가적 자세에서였다. 작품의 아름다움은 인정하면서도 장래가 창창한 젊은이들이 읽기에 그 퇴폐적 감정이 좋지 않다고 보셨다. 야심을 가진 사람에게나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봉사의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나 이욱은 좋은 본보기가 아니었다. 미신과 자기 집착에 빠져 군주로서 책임감을 등진 사람으로 여겨진다. 비참한 최후는 자업자득이었다. 아버지의 비판을 귀담아들으면서도 이욱의 그런 작품들에 대한 내 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그가 행복한 시절을 지낸 난징도 그 작품들 덕분에 그만큼 더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곳이 되었다.

남당시대(937-975)의 유적이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는데, 명 태조(1368-1398)가 황도로 삼아 도성을 축조할 때 원래 성벽 일부를 재활용했으나 정확히 어느 부분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들었다. 궁전은 지금 도시의 중앙부 어딘가에 있었는데 남아있는 유적이 없다. 1990년대에 남당 유물이 발견되기 시작한 신제커우(新街口) 구역이 궁전이 있었다고 사람들이 짐작하던 곳인데, 그 후에 열린 전시회를 나는 참관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난징에 있을 때는 옛 황도를 생각할 여가가 있거나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살아나가기 바쁠 때였고 명나라 황릉만으로 충분했다. 도시 동쪽 쑨원 묘소와 가까운 자금산 아름다운 계곡에 있는 황릉은 사람들이 괴로운 현실을 잠깐씩 떠날 수 있는 곳이었다.

부모님은 학교에서 제공한 사택에서 지내셨다. 우리 신입생들이 있던 딩자챠오 기숙사에서 멀지 않았다. 줄지어 지어진 집의 하나로, 초가지붕에 벽의 아래쪽은 판자로, 위쪽은 짚으로 되어 있었다. 원래 창고였던 우리 기숙사보다도 허술했다. 기숙사는 적어도 양철지붕에 벽 전체가 판자로 되어 있었다. 겨우내 일요일마다 사택에 가 뵈었다. 짚벽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고 우리 기숙사나 마찬가지로 난방시설이 없었다. 10월 말부터 잔뜩 껴입고 지내도 추위를 면하실 수 없으셨다.

아버지는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학교에서 벌써 중요한 과목이 되어 있었다. 수업도 많으신 데다가 수정해 줄 작문지가 엄청나게 많았다. 작문지 수정은 나도 도와드렸지만, 상급반 학생들이 내는 긴 작문지는 아버지에게 벅찬 짐이라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어머니는 걱정하셔도 아버지는 내색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내 공부에 관해 물어보셨다. 내 중국어-중국문학 과목을 늘 걱정하셨는데 담당 강사가 고전 문헌학자로 〈서경(書經)〉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자 걱정을 더 하셨다. 해낼 수 있다는 내 장담을 아랑곳 않고 내가 유의할 점들을 짚어주려고 애쓰셨다.

나는 다른 과목 이야기나 선생님들, 친구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드리려고 애썼다. 공학도에서 미술-음악 분야까지 기숙사에서 만난 다양한 친구들 이야기가 많았다. 경제학도 하나가 우리 고향 타이저우 출신이라서 아버지 관심을 끌었다. 마오자치(茅家琦)란 이름의 이 친구는 나중에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꿔 19-20세기 중국사를 연구했다. 1980년대 말에 다시 만나 보니 나랑 공유하는 관심이 많아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난징에서 첫해가 빨리 지나간 것은 매일 배우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교실 안에서보다 밖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았다. 1947년 10월 개학 후 내가 상대할 것 하나는 살금살금 다가오는 겨울이었다. 따뜻한 겨울용 가운을 지급받았으나 여러 겹 내복이 필요했다. 어디에도 난방이 없어서 같은 옷을 종일 입고 지냈고, 그 대부분을 잠옷 속에 껴입고 잤다.

화장실 사정은 원시적 수준이고 위생에 도움이 되는 시설이 없었다. 건물을 좌우로 가르는 커다란 욕실의 수도꼭지들이 주어진 전부였다. 벽은 나무로 지붕은 양철로 되어 있었는데 센 바람이 없을 때도 지붕과 벽 사이의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어느 날 아침 젖은 수건이 판자처럼 얼어있는 것을 보고 겨울을 맞이하는 마음을 다졌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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