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세지감(隔世之感)’.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에 있는 석유화학(석화) 회사, 여천NCC에 어울리는 수식어다. 여천NCC는 1999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가진 나프타분해설비(NCC)를 합쳐 만든 회사다. 석화 핵심원료라 ‘산업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 생산능력이 LG화학·롯데케미칼에 이어 국내 3위다. 2001~2021년 연평균 순이익은 2400억원이었고, 2016년 사업보고서를 낸 334개 기업 중 직원 평균 연봉 1위(1억1990만원)였다.
그렇게 ‘신의 직장’으로 불렸다. 하지만 2022년부터 내리 적자를 냈다. 최근 3년 누적 적자만 8200억원에 달한다.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던 에틸렌 생산에 집중하다 여느 석화업체처럼 중국발 공급 과잉의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 지난 8일 3공장 가동을 멈췄다. 21일까지 차입금 3100억원을 갚지 못하면 부도 위기다. 한화 측은 “신속하게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DL 측은 “경영 진단부터 다시 해야 한다”며 워크아웃(기업 재무구조 개선) 신청까지 열어뒀다. 위기에 몰린 K-석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여천NCC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석화업계 불황은 악화일로다. LG화학은 지난해 3월 여수·대산 공장 스티렌모노머(SM) 생산 라인 가동을 중단했다. 롯데케미칼도 같은 해 12월 여수산단 2공장 생산라인 일부 가동을 멈췄다. 롯데케미칼은 HD현대오일뱅크와 대산 석유화학단지 내 NCC 설비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김지훈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대표파트너는 “현재 석화업계다운 턴(downturn·하락세)은 과거와 양상이 달라 ‘버티기’로 살아남기 어렵다”며 “국내 석화업체 상황을 고려했을 때 현재 불황이 지속한다면 3년 뒤에는 50%만 지속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새 정부 대책에서 석화업계는 밀려난 모양새다. 인공지능(AI) 등 우선순위 국정 과제에 가려서다. 윤석열 정부 시절인 지난해 12월 발표한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에서 설비 폐쇄, 사업 매각, 설비 운영 효율화, 신사업 인수합병(M&A) 등에 금융·세제를 지원한다는 큰 틀은 잡았지만 세부 대책은 아직이다.
반도체·철강·조선과 마찬가지로 석화 역시 국가 기간사업이다. 중국 업체가 시장을 장악할 경우 언제든 제조업 공급망의 목줄을 죌 수 있다. 불황-호황의 사이클을 겪다 최근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최대 무기로 내세울 정도로 주목받은 조선업의 위기 극복에서 배워야 한다. 여러모로 석화와 닮은꼴이라서다.
석화는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한 뒤 중국발 공급 과잉 위기를 맞았다. 조선업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운 경기 침체와 중국발 저가 수주 남발 공세에 시달렸다. 김현수 인하공업전문대 조선기계공학과 교수는 “2010년대 STX와 대우조선해양이 법정관리를 겪으며 중국 업체에 이길 방법이 없다거나, 심지어 조선업을 접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며 “장기 불황을 버텨 가까스로 호황을 맞은 조선업처럼 석화도 포기하지 말고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업은 불황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업체 스스로 고부가가치, 친환경 선박 위주로 사업 구조를 바꿨다. 정부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매각, 부실 조선사 구조조정, 친환경·고부가 선박 개발 등을 지원했다. 현재 위기가 무조건 버틴다고 살아남는 구조가 아니라 뼈를 깎는 체질 개선까지 동반해야 하므로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
석화업계도 구조조정과 설비 통합으로 범용 제품 경쟁력을 높이고,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사업을 확대하는 식의 생존 대책에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는 “‘양보다 질’이란 방향은 섰지만, 설비 투자 비용이 큰 데다 개별 기업이 독자적으로 인수·합병을 추진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정부가 명확한 구조조정 방향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인수합병 지원책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