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개발 발목 잡는 임상시험 규제

2025-09-03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임상시험 규제' 때문에 글로벌 무대에서 제약 혁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신약 하나가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통상 10년 이상, 수조 원대의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데, 한국은 절차가 복잡하고 규제가 보수적으로 적용되어 이 과정이 더 길어지고 비용 부담도 커지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이 환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조건부 허가와 신속 승인 제도를 적극 도입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제도적 차이는 단순히 산업 성장 속도의 격차로 끝나지 않는다. 국내 제약사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고 투자 유치가 위축되는 악순환에 빠지는 사이, 환자들도 이미 해외에서 쓰이고 있는 치료제를 국내에서는 수년간 기다려야 하는 '치료 공백'을 겪고 있다. 특히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처럼 생존율과 직결되는 의약품의 경우, 한국 환자들의 불이익은 더욱 두드러진다.

글로벌은 '조건부 허가' 확산···한국은 규제 늪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가속 승인 제도를 통해 항암제, 희귀질환 치료제 등 긴급성이 큰 의약품을 임상 2상 데이터나 대리 지표만으로도 시판을 허가한다. 다만 일정 기간 내 확증 임상에서 효능을 입증해야 하며, 실패하면 승인 철회가 가능하다. 실제 노보 노디스크의 체중감량제 '위고비'는 지난 8월 지방간 치료제로 가속 승인을 받았다. 이에 환자들은 즉시 약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유럽의약품청(EMA)도 조건부 시판허가 제도를 통해 불완전한 데이터에도 불구하고 '미충족 의료 수요'가 확인되면 조건부로 시판을 허가한다. 지난해 6월에는 매드리갈(Madrigal)의 지방간 치료제 '레즈디프라(Rezdiffra)'에 조건부 허가를 권고했다. 조건부 허가는 매년 갱신되며, 조건 충족 시 일반 허가로 전환된다.

반면 한국은 보수적인 규제로 인해 조건부 허가 제도가 사실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우리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2012년 이러한 제도를 도입했지만, 실제로는 적용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고 절차도 까다로워 활용도가 떨어진다. 임상 3상까지 모두 마쳐야 허가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제약사들은 미국·유럽보다 몇 년씩 늦게 신약을 출시할 수밖에 없다. 규제가 유연한 해외에서는 환자들이 이미 신약을 쓰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임상 단계에 묶여 환자 접근성이 뒤처지고 산업 경쟁력도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환자 치료 공백, 산업 경쟁력도 위축

규제의 보수성은 곧바로 환자 피해로 이어진다. 미국과 유럽 환자들은 이미 항암제나 희귀질환 신약을 사용하고 있지만, 한국 환자는 임상시험에 참여하거나 해외 원정 치료에 의존해야 한다. 환자 단체들은 "미국에서는 보험까지 적용되는 약이 한국에서는 허가조차 나지 않아 환자들의 생존권이 위협받는다"고 호소한다.

특히 산업 측면에서 규제 지연은 치명적이다. 신약 개발에는 평균 1조원 이상이 투입되며, 이 중 절반 이상이 임상 과정에서 소요된다. 국내처럼 규제 리스크가 큰 환경에서는 투자 회수의 불확실성이 커져 중소 바이오벤처의 자금난으로 직결된다. 업계에서는 "규제 때문에 타임 투 마켓(개발 착수부터 시장 출시까지 걸리는 기간)이 늦어지고, 그만큼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자조가 나온다.

실제로 동일한 파이프라인이라도 한국에서 임상과 허가 절차를 모두 밟으면 글로벌 시장 출시가 최소 2~3년 늦어지고, 그만큼 수천억원의 매출 손실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의 자금은 규제가 유연한 해외 기업에 몰리고, 국내 바이오벤처들은 기술 수출이나 라이선스 아웃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장기적으로 혁신 신약을 직접 개발·상용화할 역량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AI·빅데이터 혁신도 '규제 벽'에 멈춰

글로벌 제약사들은 AI와 빅데이터를 임상시험 전 과정에 접목하고 있다. 노바티스는 수십만 건의 환자 진료기록을 분석해 특정 환자군만 선별해 임상을 진행하여 피험자 모집 기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화이자는 IBM과 협업해 임상 데이터 관리 자동화를 도입, 연간 수천만 달러의 비용을 절감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영국 NHS 환자 데이터를 활용해 신약 후보물질의 부작용 패턴을 사전에 예측한다.

미국 FDA는 원격 모니터링과 웨어러블 기기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임상시험 결과로 인정하며 '디지털 임상시험'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유럽 EMA(의약품청)도 빅데이터 태스크포스를 운영하며 "연내 모든 의약품 평가에 데이터 분석을 반영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AI와 빅데이터는 이미 글로벌 신약 개발의 표준 인프라로 자리 잡은 셈이다.

하지만 한국은 개인정보보호법과 의료법 규제로 환자 데이터의 병원 간 연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OECD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병원마다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이 달라 호환이 어렵고, 표준화가 이뤄지지 않아 데이터 통합이 지연되고 있다. 한국의 EMR 보급률은 OECD 최고 수준이지만, 상호 연결이 막혀 '데이터의 섬'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반복된다. 이 때문에 제약사들이 AI 플랫폼을 도입하고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환자 데이터가 부족해 "기술만 있고 쓸 수 없다"는 불만이 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임상시험산업본부(KoNECT)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임상시험 승인 건수는 664건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AI·빅데이터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임상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대부분 기존 임상 방식에 머물렀고, 글로벌에서 확산되는 분산형 임상시험이나 실세계데이터(RWD) 기반 연구는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결국 인프라는 갖춰져 있지만 규제 장벽 탓에 국내 신약 개발의 디지털 전환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로벌은 규제 풀고 '속도전'··· 한국만 제자리

중국은 임상시험 심사 기간을 60일에서 30일로 단축하며 미국과 같은 수준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소아암·희귀질환 치료제와 글로벌 다국가 임상시험 등에 신속 심사를 적용해 개시 속도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실제로 항암제 임상 개시 비중은 2009년 2%에서 2024년 39%로 급등해 미국·유럽을 앞질렀다.

전 FDA 국장 스콧 고틀리브는 "중국은 FIH(First in human;신약 후보물질이 처음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투여되는 임상시험) 임상 개시가 간단하다"고 말했다.

미국 역시 지난 6월 '국가 우선 바우처' 제도를 도입해 신약 심사 기간을 12개월로 줄였다. 미국 내 보건 위기 해결이나 혁신 치료제 제공 등 조건을 충족하면 바우처가 부여되며, 기업은 2년 내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허혜민 키움증권 연구원은 "중국이 심사 기간을 30일로 단축했고, 미국도 바우처를 통해 1~2개월 내 승인하는 유인책을 마련했다"며 "실효성 논란은 있으나 제약사 입장에선 강력한 인센티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보수적인 심사 구조에 묶여 신약 출시가 지연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바이오 산업 경쟁이 기술에서 속도로 옮겨가는 상황에서 한국도 대응이 필요하다"며 "글로벌 동시개발 임상 유도, 국내형 바우처 제도 검토, 데이터 활용 유연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우연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센터장은 "공공기관과 병원의 데이터를 제약기업 임상 데이터와 연계할 수 있는 정책적 장치가 필요하다"며 "규제 당국이 데이터 활용과 임상 절차를 유연하게 설계해야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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