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자신이 재집권하면 국내외 현안을 단시간 내에 해결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2초 안에 특별검사를 해고하겠다” “24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식이다. 2400시간이 흘러 지난달 29일 취임 100일째를 맞았지만 그가 끝낸 전쟁은 없다. 가자지구 공격을 재개한 이스라엘에 대해 미국이 압박 비슷한 것이라도 하고 있다는 소식조차 없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협상은 성과가 금세 나오지 않자 벌써 중재를 포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외교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이민자들과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 정부는 취임 100일 성과로 이민자 13만9000명을 추방했다는 통계를 내놨는데 서울 인구와 비교하면 종로구 주민 전체를 쫓아낸 셈이다.
미 정부는 강력범죄 전과자를 골라서 추방한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미국 언론은 하루아침에 멀쩡한 가족이 생이별하거나 합법적 체류자가 추방되는 사연을 거의 매일 보도하고 있다. 메릴랜드에 살던 킬마르 아브레고 가르시아는 미국 내 체류 자격이 있지만 지난 3월 미 정부의 실수로 체포돼 엘살바도르의 악명 높은 수용소에 갇혔다. 미 법무부는 “행정적 오류”가 있었다고 시인했고 법원도 그의 송환을 명령했으나 트럼프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부모가 추방되면서 미국 국적을 가진 어린 자녀가 함께 쫓겨나는 일도 있다. 지난달 24일 어머니가 온두라스로 추방될 때 함께 비행기에 탄 4세 자녀는 미국 시민권자이고 암 투병 중이었지만 당국은 이 가족에게 약을 챙겨갈 시간도 주지 않았다. 지난 2월에는 이민국이 텍사스 주민들의 단골 빵집을 급습해 주인과 미등록 이민자 8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있었다. 불법체류자라 하더라도 자주 보던 빵집 직원들이 잡혀갔다는 것은 주민들에게 충격적인 뉴스였다. 이 지역 주민은 AP통신에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에 항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에게 항의하고 싶은 민심은 지지율 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7일 보도된 워싱턴포스트(WP)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의 이민 정책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지난 2월 48%에서 53%로 상승했고, 찬성한다는 응답은 50%에서 46%로 축소됐다. WP 칼럼니스트 짐 게러티는 “트럼프 정부의 이민 단속이 폭력 범죄 전과자, 갱 단원에 집중된다면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지만 길 건너 식당 종업원을 추방하기 시작하는 순간 대중은 등을 돌릴 것”이라며 “미국은 이미 그 전환점으로 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민 문제에 있어 트럼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아마도 지난달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일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발언했던 교황은 이민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교황이 된 후 처음 로마 밖으로 나가 방문한 곳이 람페두사라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행보였다. 시칠리아 남부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 람페두사는 튀니지 해안과 130㎞ 거리여서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이주하려는 난민들의 관문이자, 침몰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낡은 배를 타고 유럽으로 이주하려던 사람들이 수십, 수백명씩 물에 빠져 숨진다.
지난달 26일 교황 장례미사 강론에서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은 교황이 람페두사에 방문하고, 미국·멕시코 국경에서도 미사를 집전했던 일을 회고하면서 교황이 “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세우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강조했다. 장례미사에는 트럼프도 참석했으나 이 강론을 귓등으로 들었을 공산이 크다. 트럼프는 취임 100일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하락한 것에 대해서도 “가짜뉴스”라고 일축해버렸다. 대단한 정신승리다.
무분별한 이민자 추방으로 미국 안팎이 시끄러운 상황에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독일에 주제넘은 훈수를 뒀다가 되레 한 소리를 들었다. 루비오는 독일 정부가 반이민 극우 정당 AfD를 ‘극단주의 단체’로 지정한 것에 대해 “진정한 극단주의는 기득권 세력의 개방적인 이민 정책”이라고 SNS에 썼다. 이에 독일 정부는 “극우 정당을 막는 게 민주주의”라고 반박했다. 지금 미국은 민주주의 잘하고 있는 독일을 걱정할 계제가 못 된다. 합법적 체류 지위를 가진 가족을 갈라놓고 이민자 부모와 시민권자 자녀를 떼어놓는 이민 정책은 정권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지난 1일에도 미국 전역에선 트럼프에게 다 그만두고 집에 가라고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