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어…” 늦은 밤, 조용히 울리는 전화 한 통. 오랜 친구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어 말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이상하셔. 며칠 전부터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시고, 사람도 잘 못 알아보셔.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충격이 크셨던 것 같아… 이젠 어머니를 내가 혼자 모셔야 할 텐데, 그게… 참 쉽지가 않네.”
그 말을 듣고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 일은 언젠가는 끝이 있어.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은 마침표가 찍히는 일이야.” 친구는 대답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아주 작은 숨소리만 들렸다. 무겁고 오래된 슬픔 하나가, 우리 사이에 가만히 놓였다.
그의 말을 들으며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어머니는 열 자식을 낳아 기르고, 모두를 건사하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그런데 열 자식은 어머니 한 분을 끝내 모시지 못했다. 돌봄이란, 그래서 한쪽으로 쏠리는 일이 된다. 주고, 또 주고, 그러다 조용히 사라지는 일. 받는 이보다 주는 이가 훨씬 오래 기억하는 일.
나는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의 아버지다. 아이와 함께 살아오며 세월은 흘러 그는 벌써 성인에 다다랐지만, 우리의 하루는 여전히 처음처럼 조심스럽고, 작고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래도 아이가 크니까 좀 나아졌겠네요.” 그 말에 나는 웃는다. 하지만 마음속엔 고요한 대답이 떠오른다. ‘아이는 자랐지만, 걱정도 함께 자랐다.’
아이가 클수록 세상은 더 낯설고, 벽은 더 높아진다. 나는 점점 지쳐가지만, 아이를 향한 마음만은 여전히 깊고 단단하다. 그래서 때때로 무서워진다. 내가 없어진 세상에서,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누가 이 아이의 밤을 대신 지켜줄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듯 바란다. “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 그 하루가 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친구는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된다. 누군가를 온전히 책임지는 일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하지만 대부분의 돌봄에는 끝이 있다. 슬픔은 언젠가 마무리되고,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끝이 없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우리 아이는 이 세상 어딘가에 남겨질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혼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을 남겨야, 이 아이가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로 살아가는 일은, 한 문장이 끝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지는 삶과 닮아 있다. 마침표 없이, 쉼표만 가득한 문장. 그 문장을 오늘도 천천히 써 내려간다. 아이를 위해, 그리고 내가 없는 내일을 위해.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그 아이가 웃는 동안만이라도 내 하루가 멈추지 않기를.
강귀만 울산장애인부모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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