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심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아래로 가게가 즐비하다. 서울 종로구의 세운상가다. 익숙한 장소에 간판과 대형 전광판 대신 홀로그램이 띄워진 모습은 어딘가 낯설다. 이 애니메이션, 25년 후 근미래의 서울을 배경으로 했다.
낭만적인 그림체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인공 난영(김태리)과 제이(홍경)로 다시 만난, 드라마 ‘악귀’(2023) 속 배우들의 더빙이다.
넷플릭스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한국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이 30일 공개된다. 2050년 서울, 화성 탐사를 꿈꾸는 우주인 난영과 뮤지션의 꿈을 잠시 접고 지내는 제이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 별에 필요한’이라는 제목엔 중의적 의미가 담겨있다. 한지원(36) 감독은 지난 27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를 통해 “제목은 사랑을 시작하자마자 지구와 화성이란 두 별로 떨어져야 하는 이 연인의 물리적 ‘이별’과 두 캐릭터가 사랑을 계기로 내면의 상처와 ‘이별’한다는 의미를 모두 뜻한다”고 설명했다.
로맨스 장르를 기반으로 했지만, 두 청년의 상처를 함께 다루는 이유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난영, 꿈에 얽힌 트라우마가 있는 제이. 둘은 사랑을 계기로 자신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또 치유한다.

‘이 별에 필요한’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과를 졸업한 한지원 감독의 첫 상업데뷔작이다. 한 감독은 최근 애니메이션 업계가 주목하는 신예다. 그는 한예종 재학시절 단편 애니 ‘코피루왁’(2010)으로 서울 인디애니페스트 대상을 거머쥐었고, 최은영 작가의 단편소설 ‘그 여름’(2017)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애니를 2021년 플랫폼 라프텔에서 공개, 인기에 힘입어 2023년엔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의 단편 애니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는 2023년 제39회 선댄스영화제 단편 경쟁, 제34회 팜스프링스 국제단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 받으며 해외에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작품에는 전작부터 두드러진 한 감독만의 색감과 그림체가 담겼다. 부자연스럽지 않게 묘사된 근 미래의 서울 명소 모습이 특히 인상 깊다. 극 중 뮤지션을 꿈꾸는 제이가 오른 노들섬의 무대, 제이가 일하는 세운상가 등이 대표적이다. 한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새로운 미래의 모습을 풀어내고자 했다”며 “레트로한 면과 미래의 요소가 어울려 있어, 앞으로도 이 모습을 유지할 것 같은 장소들로 출사를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감독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의 유행이 다시 돌아오는 Y2K 현상처럼, 2050년엔 현재의 유행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봤다. 비슷한 연령대인 젊은 팀원들의 취향을 녹여, 실제 한국의 연인들이 데이트할 때 다니는 장소를 반영하고자 했다.

특히 캐릭터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실사 촬영 단계를 거쳐 어색함이 거의 없다. 이는 대형 예산이 들어간 작품에서 ‘모션캡처’(대상에 센서 등을 붙여 움직임을 기록, CG 애니메이션 형태로 가공하는 기술)를 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상상 만으로 만들어내기 어려운 복합적 표현이 가능하다. 한국 애니메이션계에선 드문 시도다.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목소리 연기에 도전한 김태리, 홍경 배우는 작사·가창으로 OST 작업에도 합류했다. 27일 감독과 함께 기자간담회에 참여한 김태리 배우는 “배우와 감독이 모여 난영이 제이에게, 제이가 난영에게 쓰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사 작업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는 “난영이 열악한 상황에 놓였을 때, 감정을 호흡으로만 전달해야 하는 장면이 가장 어려웠다”며 “실사 연기를 했더라면 나오지 않았을 호흡”이라고도 전했다. 홍경 배우는 “‘악귀’ 때도 (김태리 배우에게) 의지를 많이 했지만, 이 작품에선 목소리로만 합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더 의지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96분. 12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