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현지매체 기자 ‘프라틱 기미레’와 인터뷰
“SNS 금지는 도화선···정부 부패·무능에 분노”
네팔 ‘금수저’ 논란이 불지펴···“청년들 주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네팔에서 지난 12일(현지시간) 수실라 카르키 전 대법원장이 임시 총리로 임명됐습니다. 시위대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건데요. 카르키 총리가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내년 3월 총선을 실시하기로 하면서 시위도 진정세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번 시위는 부패한 정부에 대한 분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차단’ 조치로 폭발하면서 지난 8일 시작됐습니다. 강경진압으로 사망자가 나오면서 시위가 커졌습니다.
네팔에서는 청년들이 중심이 된 이번 시위를 ‘젠지(Gen Z, 1995~2010년 출생 세대) 혁명’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젊은 층이 네팔 역사상 처음으로 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인데요. 젊은이들이 왜 거리로 나선 걸까요? 점선면은 지난 14일 네팔 시위를 초기부터 취재한 현지언론 ‘안나푸르나 익스프레스’ 프라틱 기미레(Pratik Ghimire) 기자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시위가 발생한 배경과 현재 상황을 알아봤습니다.

“이번 시위는 공산주의·자본주의와 같은 이념적 논쟁과는 무관합니다.”
기미레 기자는 네팔 시위를 반공주의와 같은 이념의 문제로 바라보는 한국 내 일부 시각에 대한 질문에 이같이 답했습니다. 시위가 정치적 불안정, 정부의 부패·무능 등에 대한 반발 때문에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정치인 가족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던 반면 일반 네팔 국민들은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거의 없어 해외로 가야 했고, 많은 이들이 타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네팔 인구 3000만명 중 하위 20% 연소득은 60만원 수준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최소 소득 기준인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매년 70만명 이상이 고소득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나는데요. 뉴욕타임스는 정부가 이들의 연락망 겸 송금망인 SNS를 차단하자 여기에 의존했던 시민들이 직접적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부패 문제도 심각합니다. 네팔은 국제투명성기구 부패인식지수 조사에서 180개국 가운데 107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네포 키즈·베이비’가 SNS에 전시하는 사치스러운 생활은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네포란 특권층 세습주의를 뜻하는 ‘네포티즘’을 말합니다. 최근 네팔 SNS에는 사치를 즐기는 고위층 자녀들의 모습이 네포 키즈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모 장관의 자녀가 루이비통 등 명품상자가 쌓인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선 사진이 널리 공유되며 청년들의 박탈감을 자극했습니다.
그런데 네팔 정부는 이를 SNS 차단으로 대응했습니다. 지난 5일부터 유튜브·페이스북·인스타그램·엑스 등이 마비됐는데요. 당국이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 등의 유포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26개 SNS에 대한 접속을 차단한 겁니다.

평화시위였는데 2시간 만에 19명 사망
지난 8일 젊은 세대는 평화시위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시위대가 담장을 넘어 의회에 진입하려 하면서 경찰과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고무탄과 최루탄, 물대포, 곤봉 등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했는데요. 단 2시간 만에 19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는 더욱 커졌고, 시위대는 결국 의회를 점거했습니다.
정부 수반인 샤르마 올리 전 총리가 지난 9일 사퇴하고, SNS 금지 조치도 철회했지만 시위는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시위대는 대통령궁과 의회, 대법원, 현직 및 전직 정치인 24명의 관저에 불을 질렀고요. 한 장관은 속옷 차림으로 끌려다니기도 했습니다. 기미레 기자는 “이번 시위는 젊은 층이 시작했지만 일부 기회주의적 집단들이 참여하면서 폭력 행위가 발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상황은 시위대가 지난 9일 치안을 담당하게 된 군대와 임시정부 논의를 시작하면서 달라졌습니다. 수천명의 청년들은 온라인 채팅 플랫폼 ‘디스코드’를 통해 의견을 모은 뒤, 현 의회를 해산하고 6개월에서 1년 정도 임시 정부를 구성해 새 의회를 선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정부와 군은 이것을 받아들였고요. 임시 총리로 추대된 수실라 카르키는 네팔의 첫 여성 대법원장으로, 청렴하고 대담한 인사로 평가됩니다.

현실적 요구·민주화·반네포티즘, ‘젠지 혁명’ 3요소
한국 내 일각에서는 네팔 정부의 이념이나 친중 행보가 이번 시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데요. 정작 시위를 주도한 청년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이념과는 무관하다며 시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기성정치와는 선을 긋고 있습니다. 기미레 기자는 시위에서 만난 청년들이 일자리, 부패 근절, 제대로 된 정부 서비스의 제공과 같은 매우 구체적인 문제를 언급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번 젠지 혁명은 청년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기로 결심했다는 점에서 네팔 정치사에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네팔이 민주화에 대한 높은 열망을 가진 역동적인 나라라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정치에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던 것도요. 네팔 시민들은 1990년 봄 봉기로 왕정을 무너뜨렸고 2006년 왕정복고 시도 역시 시위로 무산시켰습니다. 2013년엔 기업인·학생·주부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공무원에 의한 성폭행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번 시위 전엔 부패와 측근 정치로 시민들이 정치에 효능감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됐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시위를 촉발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네포티즘에 대한 분노에 있습니다. 네포티즘은 미국에선 할리우드 배우 2세들이 부모의 후광으로 좋은 배역을 따내는 상황을 설명할 때 주로 쓰이고, 한국에선 ‘금수저’로 번역되곤 하는데요. 본질적으로는 공정해야 할 영역에 사적인 것이 개입해 특혜가 주어지는 현상을 네포티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패, 양극화 문제가 심한 인도·필리핀·인도네시아 등에서 확산한 문제의식이 네팔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됩니다.
한국은 네팔의 시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권력의 부패와 특혜 논란, 빈부 격차, 청년 실업, 언론·표현의 자유 탄압 문제는 네팔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과 9개월 전 한국 청년들도 각종 특혜 논란을 숨기려는 반민주적인 권력에 맞서 거리로 향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을까요. 정치권이 변화를 바란 청년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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