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들’이 저지른 친위쿠데타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패배가 명확해지자 이번에는 대법원이 그들을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군부 독재 이후 법치를 강화해온 시간을 통해 법률가들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먼저 변호사들의 전성시대가 열렸고, 정치 검사가 등장했으며 마침내는 검사가 직접 정치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게 윤석열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변호사들은 검사나 판사처럼 은폐된 장막 안에서 법률을 휘두르지 않고 언제나 시민들과 함께 살아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차원에서 상대적이다. 원인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지만 법치를 핑계 삼아 법이 민주주의의 원리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은 법률가들이 가진 정치적, 사회적 기득권과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게 된 법
최근에 고 김종철 선생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를 다시 읽으면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결국 이 모양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새삼 깨닫게 됐다. 널리 알려진 대로 선생은 자본주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없음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설하곤 했는데 그것은 경제성장이 자연에 대한 수탈과 착취, 그리고 빈부격차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자연의 파괴는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자연이 바로 경제적 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부의 원천이긴 하지만 경제성장(자본증식)의 동력은 인간의 노동력이기 때문에 결국 경제성장은 자연과 인간(성)의 훼손 위에서만 가능한 법이다.
이 말은 경제성장이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또 훼손한다는 의미와 같다. 민주주의를 간단하게 (핵심만) 말하자면 ‘민중의 자기 통치’인데 민중의 거처인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하찮아지면 민주적인 공동체의 원리인 상호부조와 환대, 호혜가 불가능하게 되고 그에 따라 민주주의도 허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아도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보살피고 끊임없이 갱신하고 또 각고의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든 휘청거릴 수 있는 것인데, 민주주의에 쏟아야 할 노고를 경제적 부를 늘리는 데 낭비하면 그만큼 위태로워진다는 것은 그간의 역사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선생은 그동안 근대민주주의가 지탱됐던 것은 그나마 경제성장이 그 허약함을 은폐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경제성장이 더뎌지거나 멈추게 되면 근대민주주의는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다고 강조한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등장한 것이나 유럽에서 이민자에 대한 혐오 등 극우적인 현상이 나타난 것은 결국 경제성장의 문제와 관계가 있으며,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정치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다음 순서는 파시즘일 거라고 진즉부터 경고했던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는 윤석열 검사가 나타나 본격적으로 정치를 사법화시켰고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재등장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 혹은 방관이나 나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다.
‘민중의 자기 통치’ 근본 회복을
고대 아테네 사회를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부르곤 하지만 사실 아테네 민주주의도 여러 방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공격은 내부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지나친 물질적 풍요로 인한 정신적 나태였는데,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 후 동맹을 맺은 폴리스들로부터 동맹의 방위비 명목으로 걷은 돈을 자신들이 유용하기 시작했다. 이 동맹이 델로스 동맹인 것은 금고를 아테네에서 멀리 떨어진 섬인 델로스에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테네는 훗날 그 금고를 아테네로 옮겼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절정기라고 알려진 페리클레스 치하도 이런 제국적인 질서 위에서 가능했다. 결국 아테네의 독단과 횡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됐고 이 전쟁으로 고대 그리스 문명은 저물기 시작한다.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하나의 현상 혹은 사태에 함축된 맥락도 보통 복잡한 인과관계로 이뤄진 게 아닌데, 하물며 일인인 왕의 통치가 아닌 다수인 민의 정치인 민주주의임에랴. 이럴 때일수록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먼저 민주주의는 주인 된 민중의 자기 통치이지 법의 민중 통치가 아니라는 것, 민주주의는 자연과 공동체에 기반한 상호부조와 환대의 사회여야 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차이와 분열의 방치 혹은 조장이 아니라 대화와 숙의를 통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물질의 노예가 된 왜소한 개인들이 아니라 이상을 가진 개인들의 연합체라는 것 등등.
김종철 선생이 전한 바, 간디의 묘비에는 ‘세상의 일곱 개의 큰 죄’가 새겨져 있는데 그중 첫째가 이상을 결여한 정치다. 주인이란,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이상을 품고 있는 존재를 가리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