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4년 음력 5월, <광해군일기> 편수가 끝났다. 1633년 12월 <광해군일기> 중초본이 완성됐고, 이를 기반으로 이듬해 5월 정초본이 마무리됐다.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실록’이 아닌 ‘일기’로 명명됐지만, ‘실록’이든 ‘일기’든 사초(史草)로만 존재했던 조각의 기억들이 체계적인 기록이 됐다.
기억이 기록이 되면, 기록 대상이 된 인물들은 역사의 판단 앞에 서기 마련이다. 그 17년 전인 1617년 겨울, 이영구 등 당시 70여명의 과거 합격자 행적도 역사의 판단 앞에 섰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은 개인 노력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보면 국왕이 내린 가장 큰 은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합격자 발표가 이뤄지면, 합격자들은 국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를 담은 사은례(謝恩禮)를 행했다. 사은례의 핵심은 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 큰어른인 대비를 향한 배례였다. 감사와 충성의 의미를 담는 행사였기에 국왕만큼이나 왕실의 큰어른에 대한 배례 역시 중요했다.
그런데 당시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의해 서궁에 유폐된 상태였다. 폐비의 상태였으므로 당시 70여명의 과거 합격자는 사은례를 행하면서도 대비전을 향한 배례를 하지 않았다. 광해군 입장에 동조하는 조정 분위기를 반영한 행동이었으므로, 여기에서 그쳤다면 도의적 문제로만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을 향한 비판이 있자, 다음날 광해군에게 연명 상소를 올려 “신 등이 어제 사은할 때 감히 서궁에 절하지 않은 것은 우리 주상이 교화시키고 길러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감히 원수의 뜰에 무릎을 꿇을 수가 없어서였습니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왕의 심기에 맞추기 위해 인목대비가 유폐된 서궁을 ‘원수의 뜰’로 지칭한 것이다. 광해군대 다른 일들에 비해 크게 문제가 된 일도 아니어서, 기억의 휘발성을 믿었던 70여명의 과거 합격자는 박제된 기록 앞에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그 이후 17년, 그것도 인조반정 이후 10여년 동안 승승장구해 조정 요직에 올라 있었다. 광해군이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이유로 폐위되었음에도, 이 사실에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관원들이 인조의 조정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원, 정백형, 김덕승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저는 알지 못하였는데, 저들이 몰래 이름을 써서 그 무리들 가운데 섞어 넣었다”며 당시 상황에 대해 변명했지만 역사의 평가를 바꿀 수는 없었다.(김령, <계암일록>)
광해군에서 인조로 정권은 바뀌었고, 전 정권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주요 이유에는 인목대비 서궁 유폐가 있었다. 인조의 조정에서 인목대비 서궁 유폐를 암묵적으로 동의했거나, 실제 그 논의 과정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용인되기 힘든 이유였다. 특히 도덕과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의 상황에서 서궁을 ‘원수의 뜰’로 지칭한 70여명의 과거 합격자의 처신은 더더욱 용인되기 힘들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광해군의 인목대비 서궁 유폐를 어떻게 평가할지와 상관없이, 조선시대 도학으로 무장한 정치인이었다면 최소한 인조의 조정에는 서지 않았어야 했다. 그게 그 당시의 도리였고, 그래서 역사의 평가도 냉혹했다.
2025년, 또다시 정권이 바뀌었고, 전 정권 몰락의 이유에는 불법계엄과 내란이 있었다. 2025년 국민이 바꾼 정부에서 불법계엄과 내란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거나 그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용인될 수 없는 이유이다. 특히 민주주의를 자기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는 우리 시대 정치인이라면, 이처럼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피치 못할 계엄’이라거나 ‘내란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 현실을 이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