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환기(1913~1974)는 1963년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해 한국 작가 최초로 명예상을 받았다.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은 사건이다. 그러나 김환기 개인에게 수상의 영광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미국관 전시 작가로 회화 45점을 출품해 그랑프리의 영예를 안은 아돌프 고틀리브(1903~1974)의 추상표현주의를 만난 것이다. 김환기는 변화하는 현대미술의 흐름에 강한 도전 정신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미국 뉴욕으로 향한다. 유력 갤러리들이 즐비한 매디슨애비뉴를 매일 같이 거닐며 고틀리브,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등을 만났고 형상을 벗어던진 완전한 추상에 이른다.
60여 년 전 두 거장 사이에 교차했던 예술적 공명과 상호 영향을 깊이 있게 조망한 전시가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31일 개막한다. 아돌프&에스더 재단과 환기재단의 협력으로 열리는 이번 2인전은 ‘추상의 언어, 감정의 우주’라는 제목처럼 추상이라는 보편 언어로 우주의 본질을 포착하려했던 두 거장의 여정을 살피는 자리다.
갤러리 2·3층에 걸쳐 총 16점의 회화가 공개된다. 모두 1962~1973년 작품으로 김환기의 추상 작업이 성숙하던 결정적 시기다. 실제 갤러리 2층에서는 김환기의 1967~1971년 작품 10점을 만날 수 있는데 1967년까지만 해도 곡선과 형태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1971년에 이르면 화면 전체가 오롯이 점으로 채워지는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 둥근 형상이 절제된 십자 구도로 변하고 다시 사분면을 해체해 전면점화로 진화하는 5년 여의 궤적이 한눈에 보인다. 또 1967년에는 비교적 작은 크기로 제작되던 작품이 대형 화면으로 진화하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는데 김환기의 뉴욕 생활이 점차 안정되어간 흔적이다.


김환기보다 10년 일찍 태어난 고틀리브는 이 무렵 예술적 정점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터키색 배경 위로 부유하는 푸른 구체와 폭발적인 붉은 붓질이 병치된 1962년작 ‘익스팬딩(Expanding)’은 작가의 대표적 ‘버스트’ 연작 중 하나다. 푸른 색과 붉은 색, 정형과 비정형이라는 극적 대비를 통해 즉각적 감정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스타일이 도드라진다. 캔버스를 수평 분할해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고 상징적 형태와 색채의 배치로 인간 내면의 풍경을 끄집어낸 ‘상상적 풍경’ 연작도 만날 수 있다.
두 거장의 예술 여정을 오롯이 즐기는 것도 좋지만 작품 사이에 오가는 예술적 대화에 귀 기울이면 전시가 더욱 깊어진다. 두 사람은 나고 자란 문화적 배경부터 추상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의 종류까지 서로 달랐다. 뉴욕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고틀리브는 로스코, 뉴먼 등과 함께 195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개척한 인물로 형태와 색채의 대비를 통한 역동성이 특징이다. 반면 전남 신안의 푸른 하늘과 바다, 달항아리를 그리다 태평양을 건너간 김환기의 화면에서는 명상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무수히 찍힌 점들이 만드는 시적 리듬은 밤하늘의 별자리 혹은 우주 그 자체를 연상시킨다. 두 거장은 1974년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두 작가의 직접적인 교류 기록은 많지 않지만 김환기의 뉴욕 시절 일기에는 고틀리브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취해 그의 목소리를 들은 후 안도했다는 글귀가 남아 서로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페이스갤러리 65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는 두 거장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이 쉽지 않아 개최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이영주 페이스갤러리 디렉터는 “고틀리브는 추상표현주의 선구자 중 한 명이지만 한국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며 “고틀리브와 김환기처럼 타임리스한 작가를 널리 알리고픈 바람에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0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