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세계체제론의 저자 월러스타인(I. Wallerstein)은 35년 전 동구권이 무너지자 깜짝 놀라 그렇게 말했다. 세계 질서는 미국·유럽·동북아시아 삼권으로 재편되고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동시에 쇠퇴할 것으로 예견했다. 이를 후쿠야마(F. Fukuyama)가 맞받아쳤다. 역사는 결국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로 판명됐다고. 모두 틀렸다. 세계체제는 미국과 중국 두 패권국으로 갈라졌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의 시대는 수렁에 빠졌다. 두 패권국의 충돌이 20세기 지구촌의 번영을 구가했던 기본 질서를 이렇게 간단히 무너뜨릴 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우리가 알았던 세계의 종언은 맞다.
자유무역을 끝장낸 황제의 행차
미·중 양극체제도 언젠가 저물 것
최약체 신라가 통일 주역 된 의미
고도에서 그 역사적 필연 인지하길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구촌을 쥐락펴락하는 두 제왕이 천년의 고도(古都)에 온다. 세계 교역량 49%, 세계 GDP 61%를 차지하는 APEC 참여국들을 내무사열하고 뒤바꾼 질서의 원칙을 훈시하기 위해. APEC은 자유무역을 기조로 한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경제협의체다. 그런데 관세의 제왕 트럼프가 보호무역으로 급선회하자 중국도 고(高)관세로 돌아섰고, APEC 국가들은 관세 폭탄을 맞을까 황급히 몸을 숙였다. FTA와 같은, 우리가 아는 ‘정다운 세계’는 막을 내렸다. 두 패권국이 트(럼프) 황제와 시(진핑) 황제의 행차 소식을 친히 통보한 것은 사전 조율이 됐다는 신호라 해도 초긴장 상태다. 세계 질서는 바야흐로 그들의 입에 달렸다. APEC 참가국들은 저관세 궁리에 안이 달았고 황제에게 바칠 공물 준비에 여념이 없다.
만조백관과 대상(大商)들을 대동하고 경주에 들어선 두 황제가 처음 목격할 것은 집채보다 큰 고분군(古墳群)이다. 트 황제는 눈이 휘둥그레져 물을 것이다. 유럽 고대 도시에서도 없는 저것이 무엇인고? 신라 왕릉이옵니다. 아, 왕의 무덤. 그럼 그렇지, 나 같은 절대군주에게 어울리는 무덤일진저! 우쭐하고 흐뭇해하는 트 황제의 표정은 쉽게 짐작이 간다.
반면 시황제는 그의 고향 시안(西安)의 진시황 무덤을 익히 보았던 터다. 북경 자금성만 한 무덤 규모도 그렇지만 땅 밑에는 수천 명의 장수와 군졸들의 조각상이 열병 형태로 묻혀 있다. 중국 주변의 모든 인종이 망라된 지하 인종박물관이다. 그러니 경주 왕릉의 작고 아담한 모습에 피식 웃지 않을까만, 두 황제 공히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에 번성했던 삼국 중 최약체인 신라가 통일에 성공했다는 사실 말이다. 불과 30년 만에 미국의 일극 체제를 깬 중국처럼, 미·중 양극 체제에 도전하는 국가가 언젠가는 출현한다는 역사적 필연 말이다.
삼국 중 가장 강력했던 고구려는 한족과 만주족 등 새외(塞外) 세력의 동진과 남진을 막느라 국력을 거의 써버렸다. 이민족과의 싸움에 지쳐 한반도로 방향을 돌렸을 때는 백제와 신라가 힘을 기른 후였다. 남조 문화를 수용해 국력을 키웠던 백제는 고구려와의 잦은 충돌로 힘이 곧 쇠약해졌다. 남은 것은 약체 신라. 신라는 당(唐)과의 제휴를 통해 군사력을 보강했다. ‘연결’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고대국가로서는 혁신적 발상이었다. 개방정책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문화를 흡수했다. 가야정복 후 가야 김씨 김유신을 등용했고, 가야의 제철 기술을 재빨리 습득했다. 화랑도는 국제정세 감각을 군사력으로 변환시킨 호국정신의 연금술이었다. 신라 청년들은 결혼과 함께 수의(壽衣)를 만들어 갈무리했다. 죽음을 예비한 결사봉공 관습이었다. 불교적 국가관과 유교적 정치관을 접합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도 신라였다. 천년 고도 경주에는 ‘배척과 독점’이 아니라 ‘수용과 융합’이 배태한 권토중래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두 황제가 주목해야 할 점이다. 기술독점과 자원의 전략화로 지구촌을 절벽으로 몰아가는 격투기로는 경주 APEC 비전인 ‘지속 가능한 내일’은 없다. 연결, 혁신, 번영? 트 황제에겐 허튼소리다. 관세는 상호연결망을 절단하고 약소국의 혁신 노력을 짓밟는다. ‘No Kings in America’를 외치는 시위 군중에 트 황제는 오물을 퍼붓는 유튜브를 내보냈다. 미국 맞나? 그러니 종파 간 대립과 갈등을 일승불교(一乘佛敎)로 종합한 원효의 화쟁 사상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다.
한국에 허용된 길이 있는가? 바늘 틈처럼 좁다. 주최국이라 해도 이 거칠고 도도한 흐름에 돌 하나 던질 수 없다. 바로 내일 부산에서 이 대통령과 트 황제 만찬이 예정돼 있는데, 안건은 3500억 달러 현금 공납 방식이다. 150억 달러, 혹은 250억 달러 8년 분납. 이 난데없는 빚은 대체 무엇인가? 3억5000만 미국인에게 5000만 한국인이 일 인당 7000달러, 한화로 약 1000만 원씩 갚으라는 얘기다. 며칠 전 캐나다는 괘씸죄에 걸려 10% 관세를 더 맞았다. 우리가 알았던 미국이 아니다. 정치권은 국정감사니 주택정책이니 서로 삿대질할 때가 아니다. 한국인을 빚쟁이로 만든 이 문제를 어쨌든 풀어주길 바란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사설] APEC, 실리와 국격 동시에 챙기자](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5/10/27/news-a.v1.20251027.7f8373b4dba04f7cae92cd5b9d12ae47_T1.png)
![[청론직설] “경제 개혁 미루다 ‘잃어버린 20년’…‘정치과잉 시대’ 끝내야”](https://newsimg.sedaily.com/2025/10/27/2GZCBWMF6N_1.jpg)
![[ANDA 칼럼] '경주 APEC' 글로벌·국익 창출의 기회로 만들자](https://img.newspim.com/news/2022/05/19/220519130659573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