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일가 이룬 필법,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아

2025-11-13

서예 최고봉 이광사의 지극한 딸 사랑

“이 늙은이에게 어린 딸이 있었으니, 목소리는 어찌 그리 맑고, 모습은 어찌 그리 예쁜지. 성품은 어찌 그리 총명하고, 재능은 어찌 그리 많은지. 남다른 재주를 지닌 이 아이를 아버지로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손님이라도 방문하여 묶여있는 날이면 가슴이 답답했는데, 손님이 나서면 댓돌에 내려서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아이를 불렀다. 아이도 달려와 품에 안기니 오랜 이별 뒤의 상봉처럼 반가웠다. 밤낮으로 함께 놀며 풀잎에 손톱으로 무늬를 넣곤 비단이라며 장사 놀이도 하고, 맑은 모래는 구슬이라 하고 색종이는 오려서 옷을 만들었다. 나무 조각으로 집을 짓고, 솥과 냄비를 받치는 받침도 만들었다. 그릇은 밤송이 껍질로 만들고, 밥그릇은 조개껍데기를 썼다. 아이는 장난으로 먹고 마시는 것처럼 하더니 배가 북처럼 부풀었다고 자랑을 하네.” (이광사, 『원교집(圓嶠集)』)

노론에 박해 받은 소론 명문가 출신

22년 유배 기간, 학문·예술에 몰두

유배지에서 병들고 아내까지 자결

딸에게 애끓는 편지 쓰며 고통 달래

첩의 딸도 차별 않고 서예 가르쳐

오빠 솜씨 능가했지만 작품 안 남아

어린 딸과 소꿉놀이하던 때를 회상하는 이 아버지는 학문과 예술로 조선후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원교 이광사(李匡師·1705~1777)이다. 43세에 얻은 이 딸의 위로는 12살, 10살을 더 먹은 두 아들이 있었다. 관직에 있거나 교학(敎學)에 힘쓰거나 한창 일할 나이에 어린 딸과 노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이 한가한 선비는 어떤 사연이 있었나.

출세 포기하고 자기 공부 힘써

소론의 명문가 이광사 가문은 노론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으로 정치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곧이어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역적으로 지목되어 고령의 나이에 옥사하는데, 이에 자질(子姪)들은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일제히 강화도로 들어가 오로지 학문에 몰입한다. 이들은 강화학파로 불리며 학문과 예술로 성취를 이룬 진(眞)과 광(匡) 항렬의 육진팔광(六眞八匡)의 인재를 배출했다. 출세를 포기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공부 ‘위기지학(爲己之學)’이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이 시기 팔광의 한 사람 이광사는 하곡 정제두와 백하 윤순을 스승으로 삼아 양명학과 서예에 몰두했다. 생계는 아내 류씨(1713~1755)가 이것저것 돈벌이를 하여 이어갔다. 그는 이때의 일화를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하루는 이광사가 지방 수령으로 가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는데,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아내가 편지를 읽어달라고 한다. 편지 속에 뭔가를 달라는 소리가 있자 아내는 언짢아하며 고쳐 다시 쓰도록 한다. 남편은 친구 사이에 예사로 있는 일이라고 하자 아내는 “당신이 시속의 예사 선비를 자처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라고 한다. 가난한 살림에도 아내 류씨는 “명분 없는 물건이나 불의한 재물은 한 터럭이라도 구차하게 취하지 않았다.”(‘망처유인문화류씨기실·亡妻孺人文化柳氏紀實’) 참고로 이 어머니의 두 아들은 나중에 탁월한 성취를 이루는데,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1736~1806)과 예전체(隸篆體)의 대가 이영익(1738~1781)이 그들이다.

부귀영화는 아니더라도 잔잔한 행복을 누리던 이들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불운이 닥쳤다. 이광사의 나이 51세, 노론 패권주의에 대항한 소론의 정치적 사건인 을해년(1755) 옥사가 터졌다. 나주괘서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여기 연루된 이광사의 형제 항렬 팔광이 모두 북쪽 혹은 남쪽의 극변 유배에 처해졌다. 이광사는 사실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주모자의 상자 안에서 그의 편지가 나왔다는 게 이유였다. 이광사는 최북단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가는데, 친국을 당한 남편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아내 류씨가 자결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중 삼중의 고통에 처해있던 이광사는 차디찬 북변의 2월 그믐날,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는데 부모 없이 집에 남겨진 여덟살 어린 딸이 너무나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아들은 이미 혼인까지 했고 자신의 배소를 왕래하지만, 포승줄에 묶여 집을 떠난 이후 2년이 지나도록 이 어린 딸을 볼 수 없었다.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걸음마에서 소꿉놀이 하던 때, 공부에 몰입하던 어린 딸을 회상하며 기록을 남기기로 한 것이다.

“아이는 책과 글을 좋아하여 종이와 벼루를 가지고 노는 데 부지런했다. 언문은 이미 능통했고, 해서(楷書)를 쓰는데 막힘이 없었다. 나는 이 딸을 세상에 바치어 내 삶의 계승자로 삼고자 했다. 장성한 날을 기다려 온 마음을 다해 좋은 짝을 고를 참이었다. 그러나 운명이 갑자기 크게 어그러졌으니,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고 늙은 아버지는 북쪽 변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잠시 떨어지기도 어려웠던 아이를 두 해가 지나도록 보지 못했다. 이생에 다시 너를 볼 수 있다면 헤어진 뒤의 이야기를 다 해주리라.”(『원교집』)

딸은 아버지를 뵈러 가는 오라비 편에 말린 수박씨 한 봉지를 보내오고 아버지는 답장을 쓴다. “네가 이걸 고이 담아 보낼 적에 아비를 그리며 눈물 줄줄 흘렸겠지. 먹을 때마다 씨 모으느라 얼마나 마음 썼으며 아침이면 내어 말리느라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예전에 무릎 위에 널 앉히고 함께 먹었거늘, 오늘 이렇게 헤어져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답여아서과자·答女兒西瓜子’) 집을 떠날 때 여덟살이었던 딸이 열다섯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이광사는 꼬박 7년을 최북단 부령에 머물렀다. 그토록 그리던 부녀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예 이론 체계화 ‘서결’ 저술

나라에서 유배지를 옮기라는 영이 내려왔다. 이광사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선비들에게 글씨를 가르친 것이 사달을 일으켰다. 최남단의 절해고도 신지도로 정해졌는데, 3000리 길이다. 아내를 잃은 이광사는 부령에서 첩을 얻었는데, 딸 하나를 남기고 죽었다. 어미 없는 세 살배기 딸을 신지도로 데려가는데 이름을 주애(珠愛)라고 했다. 다시 시작된 유배 생활 15년, 모두 22년을 유배지에서 살다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이광사. 그는 신지도에서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한 『서결(書訣)』을 저술했고, 대흥사 대웅전의 현판 등 인근의 곳곳에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겼다. 고독과 분노와 슬픔과 기쁨을 글씨에 담아냈던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을 어린 딸 주애와 함께 했다.

주애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광사 글씨의 묘법을 전수받는데,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재주를 전해 받은 것은 주애다. (아들) 영익은 그애만 같지 못하다.” 야담집을 낸 성대중(成大中)은 이광사의 문인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썼다. “이영익과 이주애가 함께 쓴 서첩을 보았는데, 이주애가 더 나았다.”(이종묵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또 주애와 동시대를 산 문인 유만주(1755~1788)는 일기집 『흠영』에서 그녀를 언급한다. 즉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이광사의 딸,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글씨를 잘 썼지만 서출인 까닭에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한 이주애는 섬을 떠나 상경하여 혼인까지 했으나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사대부 지식인 유만주는 이주애의 이후 삶을 안타까워하며 신분과 성별이 질곡이 되는 조선사회의 문제가 천재 소녀의 재능을 좌절시킨 것으로 보았다.

나이 스물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밑에서 필법을 전수하여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이주애에 관한 세간의 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광사의 공식 기록 『원교집』에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늘 곁에서 모셨던 차남 영익이 신지도에서 ‘어린 누이동생과 장난하며 놀아서 부친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렸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적어도 이광사라면 딸 주애에 대한 기록을 곳곳에 남겼을 법도 하다. 차남 영익과 나눈 서신 대화에서 ‘참을 인(忍)’으로 자신을 다스린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억지로 물을 막는 격인 ‘참는 것’보다 처한 상황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마음공부’를 권한다. 지켜야 할 규범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따르기보다 내 마음의 주체가 되는 공부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규범에 충실한 유학자이기보다 만물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마음의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견고한 예법에 의한 적서(嫡庶) 구분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있겠다. 딸 주애가 아버지의 공식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은 대가의 명예에 흠이 될 자료를 버리는, 문집 편집의 보편적 관행 때문이 아닐까.

70평생 은둔과 유배

초년부터 체제로의 진출이 아예 막혀 70평생을 은둔과 유배로 보낸 이광사. 일견 불우해 보이지만 조선 서예의 최고봉을 이룬 그 내밀한 에너지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는 두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편지로 독려하거나 직접 가르치거나, 세상이 알아주는 인물이 되기를 기대한 아버지로 기억된다. 두 딸의 재능이 남긴 족적이 있을법도 한데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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