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차그룹의 미국 배터리 공급 거점 역할을 할 예정이었던 조지아주 배터리공장이 멈춰섰다. 완공을 직전에 두고 터진 미국 정부의 대규모 불법체류자 단속의 여파다. 이 공장은 현대차가 LG에너지솔루션과 함께 6조원을 투자해 건설 중인 시설로 내년 가동이 전망됐으나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 공장에서만 연간 약 30GWh, 전기차(EV) 약 30만대 분량의 배터리셀을 양산할 계획이었다. 지난해 현대차 북미 전기차 판매 대수인 12만대의 2.5배 규모다. 이번 사태로 일정이 상당 기간 지연될 것으로 보여 현대차그룹의 대미 투자 전략에도 큰 타격이 예상된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내 합작 배터리공장(HL-GA 배터리회사)은 미국 조지아주 앨라벨 소재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부지 한쪽 끝에 위치해 있다. 전체 부지 중 가장 많은 면적을 현대차 공장이 쓰고 있고, 나머지 부지를 현대차그룹 계열사 및 합작공장 등이 사용하고 있다.
양사는 43억 달러(약 6조원)를 공동 투자해 연간 30GWh, 전기차(EV) 약 30만대 분량의 배터리셀을 양산할 수 있는 규모로 공장을 짓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생산한 배터리셀은 HMGMA 부지 내에 함께 있는 현대모비스로 옮겨져 배터리팩으로 제작된다. 이들 배터리팩은 HMGMA와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기아 조지아 공장 등 현대차그룹 미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 전량 공급될 예정이다.
HL-GA 배터리회사는 전체 배터리 시스템 및 완성차를 아우르는 통합 생산·관리 체계의 시작점인 동시에 핵심 공급 기지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됐던 곳이었다. 현대차그룹도 미국 생산 차량에 최적화된 배터리셀을 현지 조달함으로써 전기차를 적기에 생산하고 판매할 계획이었다. 고효율·고성능·안정성을 확보해 북미 전기차 시장에서의 높은 경쟁력을 더하려는 심산이다.
실제 현대차·기아는 미국 친환경차 시장에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다. 현대차·기아는 2011년 미국 시장에서 쏘나타 하이브리드와 K5 하이브리드 판매를 시작한 이후 지난 7월까지 누적 판매 151만5145대를 기록했다. 2021년 11만634대로 연간 친환경차 판매량이 처음으로 10만대를 넘었으며 이후 ▲2022년 18만2627대 ▲2023년 27만8122대 ▲2024년 34만6441대로 매년 큰 폭으로 상승했다.

2014년 315대로 시작한 전기차 판매 대수는 지난해 12만3861대가 팔려나가며 10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10만대를 돌파했다. 이에 HMGMA는 현재 생산 중인 아이오닉 5, 아이오닉 9 외에 내년 기아 모델을 추가 생산하고, 향후 제네시스 차량으로 전기차 생산 라인업을 확대하겠단 복안이다.
하지만 이번 단속 사태로 이 같은 계획은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023년 하반기 착공한 공장은 올해 공정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며 내부 설비 공사와 함께 주요 생산 장비 반입에 착수한 상황이었다. 내년 초 가동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이번 사태로 인해 일정이 상당 기간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업계는 최소 3개월 이상 차질을 빚을 것으로 예측한다. 구금된 300여명은 LG에너지솔루션 또는 협력업체에서 생산 설비 및 장비 도입 업무를 맡은 직원들로, 이들이 귀국해도 비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3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돼서다. LG에너지솔루션은 대체인력 파견도 현재로선 고려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첫 생산까지 최소 3개월 이상 연기될 시, 약 10만대 분량의 배터리셀 공급이 늦춰지는 셈이다.
이안나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현지 H-1B 전문직 비자 쿼터가 막혀 있고, B-1 혹은 ESTA를 통한 우회로까지 막혀 외교적 해결 없이는 (직원)공백을 메울 방법이 없다"며 "1년 이상 양산 지연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현대차그룹이 제시한 26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도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자 문제 해결을 추진할 것이라 밝혔지만, 우리 기업들에 미국인 기술 교육을 통해 인력을 충원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현지 생산기지 확장에 난항이 예상되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일(현지시간) "복잡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인력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들 공장은 일반 공장과 달리 건설 난이도가 높고 기술 유출 우려 등이 있어 숙련된 국내 인력들을 대거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현대차그룹은 HMGMA 건립 당시 공장 건물은 현대엔지니어링이, 프레스 설비는 현대로템이, 차체 조립과 물류 자동화를 위한 설비는 현대위아가 맡았다. 이 과정에서 시공 인력은 현지 고용을 통해, 기술사 등 공정별 필요 인력은 한국에서 본사 및 협력업체 직원들이 수시로 파견되는 방식으로 연인원 수천명을 투입한 바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언제 미국인들을 교육시켜 공장 건립에 투입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어렵다"며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라고 토로했다.
다만 현대차그룹은 단기적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향후 계획에도 큰 타격은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입장이다. 문제가 된 HL-GA 공장은 건설 중으로 배터리를 공급받는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완공이 늦어진다 해도 다른 업체로부터 충분히 배터리를 조달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SK온이 미국에 세운 단독 공장은 연간 22GWh, 전기차 30만대 분량의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 중 약 80%를 현대차그룹에 납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LG에너지솔루션도 국내와 해외 공장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현대차그룹 미국 공장에 납품하고 있다. 여기에 HMGMA에서 올 상반기 3만대 가량의 EV를 생산한 만큼 배터리 공급에는 큰 차질이 없을 것이란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배터리뿐만 아니라 현대차그룹이 미국 내 생산시설 신·증설을 추진 중인 자동차·철강·로봇 등 모빌리티 산업 공급망 자체의 확충에 제약이 있을 것으로 예상돼, 현대차그룹의 북미 생태계 전략이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