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부인의 뒤틀린 ‘궁궐 사랑’

2025-10-30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같이 갔었더라면….” 1979년 7월 방한했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당시 직함)은 창덕궁 후원(당시 명칭은 비원)을 먼저 다녀온 부인 로잘린 여사의 이 말에 바로 오후 일정을 바꿨다. 부부가 승용차로 창덕궁 경내를 한 바퀴 돌고 인정전 앞을 산책하고 있을 때 한국의 문공부(현 문체부) 장관이 그제야 통지를 받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당시 일간지들은 이를 ‘미국 대통령의 예정에 없던 주말 데이트’라며 훈훈한 일화로 보도했다.

주무부처 장관도 모르는 새 남의 나라 고궁을 둘러본 미국 정상 얘기가 지금 보면 뜨악하지만 그 시절 궁궐 향유는 일부 계층의 몫이었던 듯하다. 1963년 주요 궁궐이 ‘사적’으로 지정된 후로도 오랫동안 수학여행 코스나 외국인 타깃 관광지로 인식됐다. 심지어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 경축 리셉션’이 경복궁 경회루에서 1200여 내외빈이 참석한 채 진행되기도 했다. 권력의 후광을 벗고 고궁 문이 일반인에게 활짝 열린 건 1990년대 후반 창덕궁 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이 4대 궁궐의 복원·활용에 적극 나서면서다. ‘야간 궁궐 관람’ 등이 대중화하면서 K팝 그룹 방탄소년단이 근정전을 배경으로 춤추고 노래할 수 있게 됐다. ‘고궁 향유의 민주화’라 할 만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의 ‘궁궐 사랑’이 튀는 건 이런 민주화 흐름에 역행해서다. 이재명 정부의 첫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문체위)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이들의 궁궐 방문 내역(민형배 의원실 제공)은 2년간 총 12차례나 된다. 꼼꼼히 들여다보니 처음엔 ‘관람’ 목적으로 갔다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이후엔 외교와 친교 행사의 장으로 활용한 모양새다. 휴궁일에 외교 목적으로 궁궐을 활용한 것 자체가 문제일 순 없고 비공개가 불가피한 행사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종묘 안에서도 출입이 제한되는 신실(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을 예정에 없이 열어준 것 등은 ‘의전 특혜’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국가유산청에 오래 근무한 관계자는 “높은 분이 오시면 하나라도 더 홍보하고 싶은 게 청의 입장인데, 목적이 불분명한 요청까지 수발들다가 이 사달이 났다”고 씁쓸해했다.

국감에서 아쉬웠던 것은 여당이 이걸 정치적으로 확대해 ‘국보 농단’으로 밀어붙이면서 보여준 또 다른 ‘시대착오’다. 김건희 여사가 근정전 어좌(용상)에 앉은 걸 두고 “일개 아녀자가 왜, 용상에!” 할 땐 우리가 아직도 조선 왕조를 살고 있나 싶었다. 김 여사의 어좌 착석이 볼썽사나운 것은 애초에 방문 목적이라던 외빈 접대 점검과 아무 관계가 없어서이고, 아무리 재현품일지라도 문화유산 보호를 솔선수범해야 할 대통령 부인의 행보라기엔 경박해서다. 국가유산의 사적 유용은 안 될 일이지만 ‘성역화’ 하는 것도 진짜 궁궐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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