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광복절이 있듯이 중국에는 전승절이 있습니다. 1945년 9월 3일,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참모총장이 일본 지나파견군 사령관에게서 항복문서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2014년부터 이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금년에는 전승절 기념 열병식도 있었는데 여기에서 해프닝이 발생했습니다. 시진핑이 푸틴·김정은과 더불어 천안문 망루로 이동하는 중에 벌어진 일로서, 푸틴이 “생명공학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인간의 장기는 계속해서 이식될 수 있으며, 오래 살수록 더 젊어지고, 심지어 불멸도 가능해진다”고 말하고 시진핑이 “일각에서는 이번 세기 안에 인간이 150세까지 살 수 있다고 예측하고 있다”고 답하는 대화가 생중계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온 것입니다.
무협소설의 클리셰 ‘영생 비술’
시진핑과 푸틴도 가능성 언급
영생의 욕망은 추악한 것인가
판타지도 현실 반영하는 법

우리도 친구들과 만나면 공통의 관심사를 화제로 올리는 일이 흔하듯이 70대 나이의 푸틴과 시진핑도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전승절 열병식에서 하필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적절한 것인지 의문스럽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최근 뉴스에서 자주 눈에 띄는 납치 및 실종 사건이 장기 밀매와 관련될 수 있다는 의혹이 떠올라 기분이 몹시 안 좋아집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문득 두 편의 한국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2009년에 발표된 임준욱의 『무적자(無籍者)』, 또 하나는 1995년에 발표된 좌백의 『야광충』입니다. 『야광충』은 무협소설이고 『무적자』는 현대 판타지이면서 퓨전 무협입니다.
『무적자』의 주인공 임화평은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 살수로 활동하던 무림인이 죽은 뒤 현대 한국에 환생한 인물입니다. 그는 무공을 숨기고 평범한 요리사로 평생을 살았는데, 딸이 중국 여행을 갔다가 장기가 적출된 상태의 시신으로 발견되어 복수에 나섭니다. 재벌가 사위를 둔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이 불법으로 심장 이식을 받기 위해 꾸민 일임이 밝혀지고, 주인공은 먼저 한국에서, 그다음엔 중국에서 관련자들을 찾아 복수합니다.
여기서 법륜공 수련자들의 강제수용소가 등장합니다. 법륜공 수련자들이 장기이식 산업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의혹을 소설의 주요 설정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복수의 과정에서 주인공은 강제적 장기이식의 희생자가 될 뻔한 희귀 혈액형의 미국 여성과 이스라엘 여성, 그리고 법륜공 수련자들을 구출합니다.
『야광충』의 시대 배경도 『무적자』 주인공의 전생과 같은 원명 교체기입니다. 주인공 야광충은 햇빛에 노출되면 안 되는 특이 체질이고 그래서 이름도 야광충입니다. 그 체질을 벗어나려면 사람의 피를 마시는 흡혈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체질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스승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주인공의 스승은 무림 문파 천산파의 장로인 몽고인 로부 옹고트인데 한족 무림인으로 위장하여 주인공을 어려서부터 키우고 가르치고 조종해왔습니다.
로부 옹고트의 목적은 야광충을 이용하여 자신이 영생, 즉 ‘불멸’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야광충이 흡혈귀가 되고, 그 흡혈귀가 1000명의 사람 피로 만든 천인혈이라는 비약을 복용함으로써 완전체가 되며, 그렇게 만들어진 완전체의 몸을 탈취함으로써 영생을 이룬다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천인혈을 복용하지 않고서 자신의 의지만으로 흡혈귀 상태를 벗어나 정상적 인간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하고, 그럼으로써 로부 옹고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야광충과 로부 옹고트의 관계는 노예와 노예주의 관계이고, 야광충이 로부 옹고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는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알레고리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로부 옹고트와 야광충의 관계를 상징계와 주체의 관계로 볼 수도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상징계의 문화 질서에 대한 비판이나 해체의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 그려진 영생의 비술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비술은 단지 판타지적 상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맥락에서 장기이식 기술의 극대화라는 비유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현실적 맥락에서 질문이 제기됩니다. 영생의 욕망은 추악한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장르소설들에는 클리셰가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클리셰는 단순히 비난만 받을 것은 아닙니다. 클리셰 속에서 클리셰를 넘어서는 통찰이 구현되기도 합니다. 『야광충』과 『무적자』라는 두 편의 한국 장르소설에서 저는 그 구현의 좋은 예를 발견합니다.
성민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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