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머니즘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간이 너무나 추악하고 잔인한 짓을 해도, 결국은 사랑과 우정 그리고 연민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에 반발심이 들기도 했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그린 <쉰들러 리스트>와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며 휴머니즘의 위대함을 느꼈지만, 반세기가 지난 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탄압하고, 학살하고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거리낌 없이 타인을 짓밟는 존재인 것일까? 인간은 사악하게 태어난 걸까? 그런 생각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대사에 공감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조금 생각이 변한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4일에 개봉한,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각색한 <말없는 소녀>를 봤다. 2023년 영화의 재개봉이다. 1980년대 아일랜드의 시골. 아버지는 도박 중독의 망나니고, 어머니는 네 딸을 키우며 임신까지 해 신경쇠약 상태다. 가난은, 모든 일상을 시들게 한다. 아무런 돌봄을 받지 못하고 조용히 구석에서 지내는 넷째 딸 코오트는 방학이 되자 부유한 친척 아일린과 숀 부부의 집에 맡겨진다. 아마도 처음으로 코오트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경험한다. 아침이면 우체통에서 편지를 가져오고, 샘물에서 물을 길어 오고, 요리에 쓸 감자 껍질을 벗기고, 젖소 목장을 청소하고, 식사하며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한다. 말 없던 코오트는 아일린과 숀 부부와 필요한 말을 나누면서 가족이 되어간다.
역시 클레어 키건 원작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작년 12월 개봉했다. 1980년대, 아일랜드의 소도시에서 작은 석탄회사를 운영하는 펄롱은 아내와 다섯 딸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간다. 자신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봉사하는 성격이다.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다가 젊은 여성들이 힘들게 노동하고 때로 학대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수녀원은 소도시의 권력이다. 마을과 학교에 많은 기부를 하고 농산물과 생필품, 석탄 등을 많이 소비하는 거래처다. 펄롱은 말없이 수녀원을 나왔지만 내내 마음에 걸린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펄롱은, 코오트처럼 부자인 친척의 집에 맡겨진 어린 시절이 있다. 가난한 삶과 조금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알았다. 어른이 된 펄롱은 그 경험을 통해, 함께하는 삶을 택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감사하고, 타인에게 더 많이 나누어주는 삶.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보면 펄롱은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겪었던 가난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 했다. 코오트의 미래도 펄롱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같은 경험을 해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편견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이야.’ 성공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부지런함으로 이루어졌다며 자랑하고, 타인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타박한다. 그리고 인색하다. 타인에게 베풀지 않으며 자기 이익만을 챙긴다. 그렇게 살아왔고, 성공했으니 바꿀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펄롱과 정반대의 길을 택한 이들이다. 펄롱은 학대받는 젊은 여성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소한의 연민과 연대를 버릴 수 없었다. 펄롱의 선택처럼, 가난한 이에게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된다.
<말없는 소녀>는 코오트의 미래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 영화를 보면 짐작하게 된다. 아일린 부부와 함께 살면서, 코오트는 다른 사람이 된다. 대단한 무엇을 받은 게 아니다. 선의와 연민 그리고 다정함. 그것만으로도 코오트의 세상은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 <말없는 소녀>가 그리는 아일린 부부와 코오트의 일상은 평범하면서 아름답고 고요하다. 코오트와 펄롱이 받은 행운은, 인간이라면 최소한으로 누려야 하는 조건이고 생활이다.
21세기를 돌아보면 어느새 세상은 차별과 혐오를 숨기지 않는 시절이 되어버렸다. 타인이 어떤 처지에 있건, 나만 잘살면 된다는 세상이다.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고, 양보하지 않으려는 좀팽이들이 너무 많다. 위선을 조롱하며 차라리 위악이 더 공정하다는 헛소리를 자랑스럽게 떠드는 청맹과니들도. 조악하고 유치한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니, 뻔하고 ‘사소한 것’들이 더욱 중요해진다. 선의, 연민, 다정함, 연대 등등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 여전히 인간에게는, 휴머니즘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