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75〉'보통사람' 노태우의 과기 리더십

2025-11-11

쉼 없는 과기 자립 5년…‘기술 드라이브’로 ICT 강국 초석

5년은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갔다. 돌아보니 떠날 시간이었다.

“저는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납니다. 다시 보통사람 여러분 곁으로 돌아가 나라와 사회를 위해 국민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퇴임을 이틀 앞둔 1993년 2월 23일 오전 10시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고별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5년 재임을 결산하며 그간의 소회 등을 피력했다. 노 대통령은 15분간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의 회견문을 읽고 30여분간 출입기자 5명의 질문에 답변했다. 노 대통령은 아래 말로 고별 회견을 끝냈다.

“우리 무대는 전 세계입니다. 넓은 세계로 그리고 미래로 나갑시다.”

민주화 이후 첫 직선제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해 '보통사람' 시대를 선언하며 출범했던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의 과학기술 지향점은 기술 자립이었다. 경제경쟁력 약화의 원인이 기술 부족에 있다는 진단 아래 '강력한 기술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했다.

노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과학기술 자립을 강조했다.

“이 시대 나라의 번영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과학기술입니다. 과학기술 자립 없이는 수출 증대도, 경제 성장도, 복지사회 구현도 이룩할 수 없습니다.”(대통령 초청 과학기술 간담회)

“과학기술은 우리 소망을 실현해 줄 '황금열쇠'입니다. 과학기술인은 그 황금열쇠를 가진 주인공입니다.”(1992년도 제1차 과학기술진흥회의)

“우리가 선진국 진입이라는 국민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입국'과 '과학기술 자립'을 실현하는 일 이외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대덕연구단지 조성 준공식).

노 정부는 출범 첫해인 1989년을 '기초과학진흥의 원년'으로 정하고 그해 12월 30일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을 제정해 공포했다. 정부는 기초과학연구 기금을 확대하고 대학 우수연구센터에 대한 지원도 강화했다.

이상희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의 생전 회고.

“기초과학 진흥 없이는 우리가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과학기술은 한 나라의 미래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정부는 그동안 '한 지붕 두 살림'을 하던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학사와 연구기능을 분리 독립해 1989년 6월 30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새로 개원했다. 1981년 1월 5일 제5공화국은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교육기관인 한국과학원((KAIS)를 통합해 KAIST를 출범했다. 단일 기관이지만 학사부문과 연구부문 이원 체제로 운영하다 보니 갈등이 하나둘 불거졌다. 초대 KIST소장과 한국 최장수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재임한 최형섭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1989년 KIST는 KAIST에서 분리해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회고했다.

이 조치로 KAIST는 17년 만에 서울 홍릉캠퍼스를 떠나 한국 최초의 기술도시인 대덕으로 이전해 1990년 3월 2일 현판식을 갖고 대덕시대를 열었다. KAIST는 이후 한국 과학기술 영재 육성과 글로벌 가치 창출 선도 대학으로 힘찬 여정을 시작했다.

1991년 4월 12일 오후 3시. 충남 대전시 대덕연구단지 도룡지구 현지에서 대전엑스포93회장 기공식이 열렸다. 기공식에는 노 대통령과 오명 대전세계엑스포조직위원장, 국무위원, 과학기술인,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했다. 대전엑스포는 총공사비 1505억원을 들여 27만 3000여평의 부지에 대형 전시관을 건립하는 공사였다. 대전엑스포는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7일까지 93일 동안 열려 한국 과학기술 현주소와 미래상을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1991년 4월 30일 오전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한국과학기자클럽(현 한국과학기자협회)가 주최한 대통령초청 과학기술 간담회에 참석했다. .

노 대통령은 기조연설에서 “이 세대 나라의 번영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과학기술”이라며 “과학기술 인재 양성과 과학기술 투자를 획기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과학기술 투자를 2001년까지 국민총생산(GNP) 5%로 확대한다는 목표를 추진했다. 우수과학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이공계 대학과 대학원 정원도 대폭 늘렸다.

노 대통령이 '노태우 회고록(하)'에서 밝힌 내용.

“1989년 우리나라 고교 일반계와 실업계 비율은 68대 32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1995년까지 50대 50으로 맞추면서 실업계 고교 학생 수를 100만명으로 확대하는 계획을 마련해 증설을 지원했다. 전문대 40여 개교 설립을 승인해 주고 학과와 정원을 늘렸다. 4년제 대학은 1988년부터 1991년 사이에 정원 크게 늘리도록 했고 특히 자연계 학과 증원 규모가 2만1000여 명에 달했다. 기업들의 대학 지원에 세제혜택을 주며 재계가 1000여억원을 출연하게 했다.”

노 대통령은 1991년 5월 31일 그동안 한시 기구로 운영했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헌법기구로 새롭게 출범시켰다. 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초대 위원장인 김성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 등 자문위원 11명에게 위촉장을 주고 아래와 같이 당부했다.

“세계 각국은 국력 원천이 바로 과학기술력이라는 인식 아래 경쟁적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자문회의가 과학기술 진흥과 정책 강화에 중추 역할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문회의는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정책 대안을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고 국가 과학기술 정책 수립에 중추 역할을 했다.

1991년 12월 19일. 노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과학기술진흥회의를 열고 그동안 관계부처가 공동으로 마련한 '과학기술혁신 종합대책'을 확정했다.

노 대통령은 과학기술연구개발에 새로운 패러다임도 제시했다. 2000년대 과학기술 7대 강국 진입을 위한 선도기술개발(G7프로젝트)사업이다. 이 프로젝트는 기존 틀을 벗어난 과학기술 사업 방식이고 연구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기획도 연구자 또는 정책부서 중심의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이었다. 기간도 단기가 아닌 10년이었다.

정부는 초고집적 반도체와 차세대 자동차, 환경공학, 신에너지, 차세대 원자로 등 11개 핵심기술개발 사업을 확정해 1992년부터 2001년까지 10년간 국책연구사업으로 추진키로 했다. 이 프로젝트는 1992년 7월 8일 충남 대덕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과학기술진흥회의'에서 확정했다.

노 정부는 1991년 12월 31일 과학기술복권 발행을 위한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법을 제정했다. 사상 첫 기술개발복권 발행으로 과학기술투자의 새로운 정책 수단이었다.

한국종합기술금융주식회사는 1992년 7월 1일 낮 12시 30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전경련회관에서 현판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했다. 기술복권은 시스템 미비 등으로 문민정부 출범 후 93년 3월 25일부터 발매했다.

92년 8월11일 오전 8시 8분(한국시간). 이날 한국은 사상 첫 과학위성인 '우리별1호' 발사에 성공했다. 우주시대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우리별 1호 개발 총책임자는 최순달 당시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연구센터 소장(전 체신부 장관)이었다.

노 대통령은 우리별 1호가 발사에 성공하자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다.

“우리 과학위성의 찬연한 불꽃은 겨레의 반만년 역사에 우주시대가 새롭게 열렸음을 알리는 서광이고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쾌거입니다.”

1992년 11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오전 11시 충남 대덕 국립중앙과학관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과학기술도시인 대덕연구단지 조성 준공식에 참석했다. 연구단지는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대덕연구단지 건설기본계획을 확정한 지 20년 만에 준공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치사를 통해 “과학기술을 우리가 이전해 주느냐, 남의 기술을 이전받느냐에 따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갈리게 되는 만큼 대덕연구단지 준공을 과학기술 입국과 자립을 앞당기는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1992년 12월 14일.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정보산업육성 국가전략계획 회의를 주재하고 2000년까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정보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청사진을 확정했다. 이 계획은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CT)강국으로 가는 디딤돌이었다.

노 대통령은 한·미와 한·일 간 기술협력 강화는 물론이고 한·러(현 소련), 한·중 등 북방국가와 기술협력도 적극 추진해 과학기술 외교지형을 확대했다.

노 대통령의 과학기술 리더십에 대해 당시 한국대통령학회 함성득 회장(현 경기대정치전문대학원장)은 “노 대통령은 강력한 정책 주도형 리더십을 보인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달리 정책추진 과정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정책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조종하고 협의할 수 있도록 중재하는 '정책 중재자형'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쉼 없이 달려 온 국정 5년. 노 대통령은 재임 중 과학기술 자립을 적극 추진한 대통령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