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년 전 2018년 9월 버스 여러 대가 경기도 파주 통일대교를 지나 북측으로 향했다. 한낮에도 고요한 북측 도로를 한참 달린 끝에 버스 행렬이 다다른 곳은 개성공단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남측 예산 100억 원을 들여 정성껏 새 단장한 사무소 건물이 단단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남측 인사들을 맞이했다. 건물 입구에 부착된 ‘공동련락사무소’ 일곱 개의 금빛 글자는 가을 햇살 아래 유난히 반짝였다. 칠이 벗겨지고 녹슨 채 방치된 공단 입주 기업의 생산 시설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마치 흑백사진 속 유일한 컬러 피사체처럼 보였다.
사무소 개소식 참석자들은 개성공단 입주 기업 생산 시설에도 연락사무소처럼 전기와 통신이 조만간 다시 들어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2004년 겨울 모두가 환호했던 ‘통일냄비’가 머지않아 다시 생산될 것이라는 덕담도 주고받았다. 하지만 2020년 6월 북한은 별안간 사무소 건물에 저주의 언어와 폭약을 동시에 쏟아부었다.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희망은 순식간에 고문으로 변했다.
한동안 잊혔던 ‘희망과 고문의 돌림 노래’ 개성공단이 올해 6월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다시 언급되고 있다. 정부는 출범 직후 첫 대북 조치로 군사분계선 일대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광복절에는 9·19 군사합의를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대북 정책 주무 부처인 통일부의 정동영 장관의 발언은 더 구체적이다. 정 장관은 7월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단을 만나 “개성이 다시 열리면 한반도의 운명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련의 조치와 발언에 담긴 대북 메시지는 분명하다. 남북 관계 복원이다. 하지만 냉정하고 실질적인 대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개성공단 재개에 대한 희망이 또다시 고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의 처지는 절박하다. 2016년 개성공단 전면 중단으로 125개 입주사 대부분은 생산 거점과 거래망을 잃었다. 정부는 피해액 일부를 보전했지만 간접 피해와 장기적 손실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2021년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서 90% 이상이 재입주 의사를 밝혔으나 재가동이 이뤄지더라도 기업마다 초기 복구 비용이 필요하다. 2021년 기준 복구 비용은 평균 25억 원이었는데 현재는 훨씬 더 많은 비용 투입이 불가피하다.
근본적 제약은 국제 제재다. 유엔 안보리 결의 2375호는 북한과의 신규 합작투자를 금지하고 있다. 미국 행정명령 13810호는 북한과 중대한 거래를 한 제3국 기업·기관까지 제재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과거 북측 당국을 거쳐 임금을 달러로 지급했던 방식이 불가능하다. 수출과 결제 역시 마찬가지다. 남북이 어떤 의지를 보여도 국제사회의 법적 장치를 우회할 수 없다.
국제 정세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달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식에서 시진핑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섰다. 남측과의 협력 없이도 체제 보장과 경제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대외에 과시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장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귀환은 우리 정부에 또 다른 부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을 비용 분담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달라진 국제 질서와 국제 제재의 벽, 북한의 전략적 선택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개성공단 재가동 논의는 정치적 수사만으로 진행할 수 없다. 과거 경험이 보여주듯이 준비 없는 희망은 이내 잔인한 고문으로 변한다. 2018년 사무소 개소식에서 리선권 당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이 “작은 씨앗이 자양분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자”고 약속했지만 불과 21개월 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쓸모없는 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질 것”이라면서 진짜로 날려버렸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부가 개성공단 정상화 카드를 꺼내고 싶다면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제도적 준비로 진정성을 증명해야 한다. 국제사회의 틀 속에서 합법적으로 운영 가능한 금융 구조, 기업 피해를 담보할 안전망, 예측 불가능한 중단 상황에 대비한 보상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개성공단은 희망 고문의 상징으로 계속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