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국 제조업 부흥 위한 ‘21세기 마셜 플랜’ 동반자로

2025-09-07

트럼프 2기 대규모 대미 투자 어떻게 볼 것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던진 관세 폭탄의 포연이 걷히면서 새로운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025년 4월 2일 트럼프가 전 세계를 상대로 국가별 맞춤형 관세인 상호관세를 선언한 이후, 100일 동안 협상이 진행됐고 지난달 7일 미국은 국가별 상호관세를 확정·발효시켰다. 영국을 포함한 3개국은 10%, 한국과 유럽연합(EU)·일본을 포함한 20개 국가는 15%, 중국·인도 등 46개 국가는 15%를 초과하는 상호관세를 부담하게 된다. 수출국의 국적을 차별하지 않는 관세(최혜국 대우)를 부과해 오던 미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트럼프의 상호관세 폭탄 막으려

한·일·EU 1조5000억 달러 투자

21세기 경제안보 동맹 시대 열고

미국 패권 강화하는 ‘마셜 플랜2’

친기업·혁신, 유연한 노동시장에

거대 투자로 자국 한계 극복 시도

제조업 강국인 한국과 일본·EU의 협상 타결 구도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 한국은 3500억 달러, 일본은 5500억 달러, EU는 60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각각 약속했고, 상호관세 인하와 자동차 관세 인하를 받아냈다. 한국과 일본·EU의 대미투자를 합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복구를 위해 설계한 마셜 플랜(Marshall Plan)에 쏟아부은 돈보다 더 많다. 1947년부터 4년간 미국이 유럽의 전후 복구를 위해 지원한 금액은 130억 달러 수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500억~1800억 달러 수준이다.

관세 협상 타결 과정에서 한국·일본·EU가 약속한 대미투자는 1조5000억 달러다. 마셜 플랜이 2차대전 직후 냉전의 초입에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서부 유럽을 지켜 내기 위한 경제 부흥 구상이었다면, 이번 트럼프 관세 전쟁의 타결 과정에서 한국·일본·EU가 미국에 약속한 대규모 투자는 미국의 제조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21세기 마셜 플랜’인 셈이다.

‘20세기 마셜 플랜’은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의 냉전을 민주주의 승리로 결정짓는 초석을 깔았다. ‘21세기 마셜 플랜’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신냉전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지을 수 있을까. ‘20세기 마셜 플랜’은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진작 부상했지만 그 힘을 국제무대에 투사하길 꺼렸던 고립주의 성향의 미국을 20세기 중반 이후 민주주의 진영의 리더로 자임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부 유럽의 경제를 재건해 공산 진영의 위협에 맞서게 했다. 미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대서양 동맹 시대를 열었다.

법원 판결에도 관세 정책 이어갈 듯

‘21세기 마셜 플랜’은 세계의 패권 국가 역할을 해온 미국이 ‘안보도 제공하고 시장도 제공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운전대를 잡지 않겠다는 불만을 마셜 플랜의 수혜국이 받아주면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셜 플랜이 1947년 시작될 때 서부 유럽의 경제가 성공적으로 부활할지, 공산 진영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2025년 ‘마셜 플랜2’가 가동되려는 지금, 미국 제조업이 부흥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분명하다. 만약 미국 제조업이 부흥한다면, 그래서 미국 대선의 판세를 결정짓던 ‘러스트 벨트(Rust Belt)’를 더 이상 러스트 벨트라고 부르지 않는 그 날이 오게 되면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의심하는 미국이 그 의구심을 떨쳐내고 다시 세계를 이끄는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

‘마셜 플랜2’는 21세기 경제 안보 동맹의 시대를 열었다. ‘마셜 플랜2’에 일본·EU와 함께 한국이 주요 이해당사자로 참여하게 된 것은 세계 경제에서 대한민국의 위상과 존재감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다. 마셜 플랜 시절에는 식민지 유산과 절대 빈곤, 전쟁의 폐허 속에 신생 독립국이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80년 만에 세계 역사의 전환기에 주요 국가로 등장한 대한민국은 첨단 제조업 강국이기 때문이다.

‘마셜 플랜2’가 성공하려면 천문학적인 대미 투자가 지속 가능해야 한다. 첫 번째 시험대는 트럼프 고관세 정책의 지속 가능성 여부다. 지난달 말 미국 항소법원에서 불법으로 판결한 트럼프의 상호관세가 대법원에서도 불법으로 최종 확정된다면, 트럼프 관세 정책의 기반이 붕괴한다.

보수 6대 진보 3의 진용인 대법원이 파당적으로 트럼프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에 대한 전망과 추측이 난무하지만, 대법원이 그의 상호관세를 불법으로 판단하더라도 트럼프는 다른 법적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관세정책을 이어나갈 것이 분명하다. 고관세 정책은 핵심 지지층을 결집하는 트럼프 정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관세, 미국 투자 결정 촉매제

트럼프의 고관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미국 사법부도, 외국의 관세 보복도 아닌 미국의 경제 상황이다. 트럼프가 상호관세의 신속 집행을 일단 보류하고 100일에 걸친 협상 국면을 가졌던 것은 미국 금융시장에서 나타난 극도의 불안정 때문이었다. ‘(관세를) 낮추기 위해 먼저 높인다(escalate to deescalate)’는 트럼프의 협상술에 금융 시장은 적응했다.

트럼프가 불과 6개월 만에 미국의 평균 관세를 2.5%에서 18%로 수직 상승시켰음에도 경악하지 않고 오히려 최악의 순간은 피했다고 자기 최면을 걸 만큼 시장은 트럼프의 압박술에 길들여졌다. 하지만 상황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고관세가 아직 미국의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있지만, 이 상황이 지속할지에 대해서는 낙관을 불허한다. 이런 불확실성에도 ‘마셜 플랜2’가 지속 가능할까.

세상은 한국·일본·EU의 대미 투자가 트럼프 관세 폭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협상 카드로만 알고 있다. 트럼프의 고관세가 실행되기 전에도 미국은 이미 세계 최대 투자 유치국이었다. 기업 친화적인 문화와 유연한 노동시장, 혁신 지향성을 가진 미국은 지난 40년간 연평균 2%가 넘는 경제 성장률을 꾸준히 지속해 왔다.

반면 일본과 EU는 1% 이하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 속에 규제가 압도하는 경제 구조로 변하면서 쇠락해갔다. 성장이 정체되고 혁신이 사라진 국내 경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들에게 미국으로의 투자는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트럼프의 고관세는 이들에게 미국으로 더 많은 투자를 더 빨리 집행하게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트럼프 관세의 경제적 귀결에 대한 불확실성에도, 투자처로서 자국과 비교해 본 미국의 상대적 매력은 여전하다.

한국에서 커지는 대미 투자 원심력

한국의 대미 투자 확대 역시 일본·EU의 전략적인 계산과 궤를 같이한다. 최근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의 경우 분열적인 정치와 정책 지속성 단절의 일상화로 인해 미국으로 투자를 밀어내는 한국 내부의 원심력이 훨씬 더 강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계가 인정하고 필요로 하는 한국의 첨단 제조업 역량이 정작 태생지인 대한민국 내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니 국내에서는 뭘 해도 문제없겠지’라는 안이한 인식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협소한 국내 시장을 뛰어넘어 세계를 무대로 역량을 확장하는 글로벌 기업을 가능하게 했던 글로벌 환경이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음을 한국 정치는 아직 모르고 있는 듯하다. 트럼프의 고관세 장벽과 중국의 제조업 공습, 인공지능(AI) 굴기는 한국의 글로벌 기업이 더는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수출하고 투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 워싱턴을 찾은 이재명 대통령이 CSIS 강연에서 “이제는 더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시대가 아니다”고 했던 발언은 경제 안보 시대의 생존 전략을 드러낸 결정적인 장면이다.

한국의 경쟁국은 어떻게 하면 자국 기업을 더 도와줄 수 있을까 정책 경쟁에 골몰하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세계 투자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 기업은 조선과 원자력, 항공, LNG, 핵심광물 분야 1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대미 투자가 늘수록 제조업의 국내 기반이 약해진다고 걱정하지만 기업에 그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미국 투자, 한국 경제 활로 찾는 도전

세계화 30년은 분업과 특화의 시대였다. ‘기획-설계-연구·개발(R&D)-시제품-대량화-조립-마케팅-판매’에 이르는 제조업의 모든 단계를 어느 국가도 완벽하게 장악하지 않았다. 미국은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기획-설계-R&D’ 단계를 전담했다. 대량화와 조립은 임금이 싼 국가로 이전됐다. 더 높은 효율성과 더 많은 이윤을 위한다는 이유로 20세기 세계 대전 승리의 발판이었던 제조업 전 주기에 걸친 미국의 압도적 우위는 그렇게 해체됐다. 트럼프가 한국에 반사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조선 산업의 몰락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국경을 초월했던 세계화의 시대가 저물고 지정학과 지경학이 연계된 신냉전의 초입에서 미국은 제조업의 모든 단계를 자국 내에서 완결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미국 제조업 르네상스’를 목표로 하는 ‘마셜 플랜2’의 성공에 한국은 승부를 걸었다. 성장 잠재력이 극도로 저하된 한국 경제의 활로를 찾기 위한 도전이다. AI와 로봇을 기반으로 미국 제조업의 혁신적 생태계를 구축해야 승산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마셜 플랜2’의 성공을 위해 미국은 자신의 숙제를 풀어야 한다. 투자 유치에만 급급하지 말고, 투자가 이윤을 내고 재투자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야 한다. ‘마셜 플랜2’의 실패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최병일 법무법인 태평양·통상전략혁신허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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