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눈] ‘설비 중심’ 저탄소·동물복지, 해법 아냐

2025-05-26

30∼40년 전 이야기이다. 일본 경제 전성기에는 일본계 은행이 전세계 금융을 좌지우지했다. 우리 은행들은 그 시스템을 모방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다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지면서 미국 투자은행의 시스템 벤치마킹이 국내에서 유행했다. 이들 시스템만 도입하면 우리나라 은행도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는 기대가 감돌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은행은 일본계나 미국계처럼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금융위기를 맞았다. 거액의 장비와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산업 경쟁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십년 전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웠다.

탄소중립·동물복지 같은 주요 키워드가 축산분야에서 회자된 지 몇년 됐다. 온실가스 감축 논의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건 축산선진국의 바이오가스 보급률이고, 거액의 설비 투자가 필요한 바이오가스 플랜트, 즉 시설 도입이다. 동물복지 또한 축사 케이지를 군사(群飼)시설로 바꾸는 막대한 설비 투자에 정부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나라 은행이 일본·미국 은행을 벤치마킹했던 시절처럼,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축산선진국의 장비부터 도입하며 벤치마킹하자는 주장을 펼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국가의 저탄소·동물복지 정책엔 농가의 부담이 늘어나는 데 따라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치밀한 전략이 숨어 있다. 저탄소 정책 도입 때는 ‘탄소발자국 제도’를 만들어 자국 축산물이 타국의 축산물과 차별화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했고, 바이오가스 플랜트가 정착되는 초기 단계엔 플랜트에서 생산하는 에너지를 높은 가격에 사주는 지원책을 병행했다.

동물복지 정책도 마찬가지다. 유럽은 오랜 기간 돼지의 경험·상태를 돼지 관점에서 관찰하는 동물행동학적 연구를 축적해 농장의 동물복지를 점진적으로 개선해왔다. 또한 동물복지와 관계된 투자로 농가의 생산경쟁력이 취약해지는 위험을 방지하고자 동물복지 기준을 준수하지 않는 외국산 축산물의 수입을 제한하는 비관세장벽도 함께 제시했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단순히 해외 시설을 모방해서 도입할 것이 아니라 축산 현장을 살피면서 중장기적인 연구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에 성과를 내고, 농장동물의 복지를 개선하는 과학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책 방향이 제시돼야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농가의 부담과 비용 상승을 지원하고, 국내 축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손세희 대한한돈협회장·한돈자조금관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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