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공보다 직무·역할 기준으로 임금체계 바꿔야

2025-11-19

65세 정년 연장 제도가 안착하려면

“젊은이는 기회가 많으니까 나갈 거면 젊은 애들이 나가야지.”

“선입선출이 원칙이구요. 연차대로 나가는 게 공평한 거에요.”

JTBC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다. 대형 통신회사 공장의 인력 구조조정 우선순위를 놓고 고참과 후배가 맞붙는 장면이다.

최근 정치권과 노동계에서 정년을 만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정년 연장은커녕 ‘희망퇴직’이란 이름의 인력 구조조정 바람이 대기업 중심으로 불어닥치고 있다. LG전자, LG유플러스, LG화학, SK텔레콤, 현대제철, 현대면세점 등 업종도 다양하다.

정년 연장에도 고령층 열악해져

고령고용 증가만큼 청년층 줄어

정년제 운영 기업 20%에 불과

청년·영세근로자엔 혜택 안가

임금체계 개편없는 정년 연장

세대 갈등, 양극화 심해질 것

준비 없는 정년 연장은 청년 고용 줄여

1964~74년 출생한 제2차 베이비부머 세대는 945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유권자의 21%, 22대 국회의원의 52.3%(157명)를 차지한다. 정년 연장을 주도하는 정치권과 민주·한국노총 지도부는 대부분 2차 베이비부머 세대다. 정치권의 법안대로 정년이 연장되면 1967년 출생자부터 혜택을 입게 된다.

지난 5일 진보당과 양대 노총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올해 안에 정년 연장 법제화를 촉구했다. 양대 노총은 국민연금 지급연령이 65세로 상향된 만큼 5년의 ‘연금 크레바스(공백)’를 메우기 위한 정년 연장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이와 함께 임금 삭감 없는 정년 연장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년을 늘린다고 고령 근로자의 고용 안정과 노후 빈곤 문제가 해결될까. 현재 65세 이상 고령층 가운데 15%는 연금을 받지 못한다. 받더라도 월 40만원 이하 비율이 약 40%에 이른다.

정년 연장으로 통계상 고령층 일자리가 늘어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열악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 비중은 만 55~60세가 16.1%, 61~64세 21.1%, 65~69세 26.4%, 70~74세 29.2%로 나이가 들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대졸 이상 단순노무직 종사자 비율도 55~60세는 6.1%에 불과하지만 65~69세(15.1%)와 70~74세(33.2%)는 크게 높아지고 있다. 정년을 연장한 지 10년이 됐지만 대졸 퇴직자도 영세자영업을 운영하거나 물류센터 등에서 단순 노무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고령 근로자의 정년 연장은 청년층 신규 채용을 더 어렵게 만든다. 한국은행은 정년 60세 의무화가 시행된 2016년 이후 고령층 근로자 1명이 늘 때 청년 근로자는 약 1명 줄어든 것으로 분석했다.

현재 정년제를 운영 중인 사업장은 대기업·공공기관 등 전체의 20%에 불과하다. 정년만 늘리게 되면 전체 근로자의 소수만 혜택을 받고 청년·영세기업 근로자 등 취약계층은 오히려 어려워지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조직 고령화와 세대 갈등

일본은 1994년 정년을 만 55세에서 60세로 연장했다. 그 뒤 고령화가 심해지자 2000년 65세 고용 확보를 노력 의무로, 2020년 70세 고용 확보 노력 의무를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정 정년은 만 60세로 유지하되 기업에 정년 폐지, 정년 연장, 계속 고용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연공서열 임금체계가 강한 대기업의 임금 부담을 고려한 조치였다. 법안 시행 뒤 대기업은 83%가 재고용을 선택했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탈 연공 임금체계 개편에 나섰다. 한국도 여러 차례 임금체계 개편을 시도했지만, 노조의 반발에 무산됐다.

한국은 1년 미만 근로자의 임금을 100으로 봤을 때 30년 이상은 약 세배(295)에 이른다. 연공임금제의 원조인 일본의 30년 이상 임금(227)보다 높다.

노조 있는 대기업 근로자는 정년 때까지 계속 임금이 오른다. 기업들 입장에선 65세로 정년을 연장하면 법 적용 이전에 조기 퇴직시키거나 청년 신규채용을 억제할 수밖에 없다. 아예 이런 부담이 없는 해외로 사업장을 옮기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좋은 일자리가 줄어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우려가 있다.

임금은 높은데 생산성 낮은 고령 근로자는 청년층의 반발을 사게 된다. 일본은 ‘마도기와 오지상’이라는 사내 유휴인력이 생산성과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회사에 출근하지만,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퇴근하는 고령층을 말한다.

50~60대 고임금 직원으로 현재 50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한국도 일부 대기업에서 고임금 고령 근로자의 비중이 높아졌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현 직원의 20%(1만6000명)가 만 55세를 넘은 고령 인력이다. 정년을 연장하면 이 많은 숫자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만큼 신규 채용이 어려워져 조직의 고령화가 점점 심해진다. 이미 기업엔 고령 근로자만 남고 청년들은 점점 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전체 고용보험 가입자 중 29세 이하 비중이 고용보험 도입 초기인 1997년 38.6%에서 현재 14.4%로 낮아졌다.

호봉급은 대기업 노조원들에게만 유리한 제도다. 노조가 있는 1000인 이상 대기업의 호봉급 비율은 75.4%나 된다. 반면 노조 없는 100인 미만 중소기업의 호봉급 비율은 10.5%에 불과하다. 중소기업의 대다수(66.7%)는 아예 체계적인 임금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호봉급 제도를 없애면 대기업 노조원들은 현재보다 불리하겠지만, 대다수 근로자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직무·역할·난이도·기술에 따라 임금을 주는 직무급제로 개편하면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완화되고 기업들은 보다 쉽게 신규 채용을 할 수 있게 된다.

정년 늘리면 연공급 임금체계 바꿔야

필자는 신문인쇄회사 대표를 4년간 지냈다. 공장 4곳에 대당 200억원 넘는 윤전기 12대를 보유한 큰 회사였다.

정년 연장으로 만 55세 이상 직원에게 임금피크제를 적용했는데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고령 직원들은 정년이 연장되면 임금이 깎여도 큰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대부분 주택 구입과 자녀 교육 등 큰 지출에서 벗어나 연봉이 적어도 회사를 계속 다니길 원했다.

둘째, 회사 입장에선 경력 30년 이상의 베테랑들을 적은 임금으로 계속 쓸 수 있었다. 이들 중 몇 명은 임금피크제를 적용하지 않고 ‘총괄’이란 이름으로 책임을 맡겼다. 이들은 코로나 팬데믹 같은 위기 때 몸값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셋째, 고령 근로자를 계속 활용하려면 젊을 때 직무 순환을 통해 ‘멀티 플레이어’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현장 근로자는 근무 공장, 주·야간조, 심지어 라인(윤전기)을 바꾸는 것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직무급 도입에 앞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해보도록 순환시키는 게 조직 유연성 측면에서 중요하다.

국회미래연구원(원장 김기식)은 19일 ‘정년 연장과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이 자리엔 안호영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장과 민병덕 민주당 의원, 김형동 국민의힘 의원이 참석했다. 한국노총과 경총도 참여해 노동계와 재계의 입장을 발표했다. 발제를 맡은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정년은 고용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공형 임금과 (임금체계 없는) 무체계가 동시에 작동하는 ‘임금체계 이중구조의 문제’다. 노사정 협의에 따른 사회적 직무급 체계는 이 두 문제를 함께 풀 수 있는 새로운 임금 질서”라고 말했다.

소수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정년 연장은 청년·고령층 모두와 정년을 누릴 수 없는 대다수 취약계층 노동자들에게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사정 합의기구 중심으로 청년·고령층·자영업자·실업자 등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 조만간 청년 인구 감소로 노동시장의 수급 불균형 문제가 심각해질 전망이다. 업종별로 철저한 직무 분석을 통해 임금 체계 개편, 청년층과 고령층의 역할 분담, 생산성과 경쟁력 확보 등 지속 가능한 보완대책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정년 연장이 성공하려면 대기업 정규직들의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선 안 된다. 정년 연장과 함께 고령층과 청년층,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해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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