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쯤 한국 사회에는 낯선 단어가 대유행했다. 이름하여 ‘4차 산업혁명’. 정보기술(IT) 주도의 인터넷 같은 ‘3차 산업혁명’ 이후 애플 아이폰발 ‘스마트 혁명’과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등을 뭉뚱그린 낱말이었다. 전문가들은 물론 정책 당국자고, 언론이고 다들 4차 산업혁명을 입에 달고 다녔다.
2017년 5월 어느 날 우린 <경향포럼> 준비차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로 달려갔다. 구글, 애플, 테슬라 같은 선구자들이 즐비한 현장에서 대체 4차 산업혁명이 뭔지, 그 단초라도 엿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거기서도 4차 산업혁명은 여전히 ‘봄날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말 듯 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 렌즈가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선 누굴 만나든 줄곧 들리는 단어가 따로 있었다. 바로 ‘인공지능(AI)’이었다. 우린 그때까지도 그걸 그냥 4차 산업혁명의 한 부품 정도로 여겼다. 심지어 지금은 ‘AI의 본진’이 된 엔비디아 본사도 찾아갔지만, 그땐 실체를 알아채긴 일렀고, 지극히 무지했다.
우린 자율주행차니 휴머노이드니 하는 드러난 ‘겉모습’에 꽂혀 있었다. 지극히 하드웨어적인 사고방식의 한계다. 그걸 가능케 하는 본질인 AI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뒤돌아보면 어제오늘이 아니다. 2009년을 전후한 스마트 혁명 때도 비싼 수업료를 톡톡히 치렀다. 스마트폰 같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그걸 구동케 하는 운영체제(OS), 즉 소프트웨어의 힘에 짓눌리지 않았던가. 구글 안드로이드, 애플 iOS에 휘둘렸듯 이번에는 또 AI에 주도권을 빼앗겨 끌려다니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이번엔 네이버, LG 등이 일찌감치 분투하고 있으나 까딱하다간 ‘미제 AI’에 또 지배당할 수 있다.
정부 대책이라곤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5만개를 확보해주겠다”는 숫자놀음 위주 같다. 비교컨대,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가 모범해법을 보여줬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 아래 고성능 GPU 없이도 챗GPT에 버금가는 AI 추론모델 ‘R1’을 내놨다.
이런 딥시크 충격의 본질을 잘 간파해야 한다. 핵심은 하드웨어 장비 숫자나 크기가 아니다. 외양만 좇다간 AI 시대엔 지붕 위에 올라선 ‘두 마리 닭’(미·중)을 올려다만 봐야 할 수도 있다.
최근 5000 대 1 축척의 고정밀 한국 지도를 구글 등 해외 기업에 반출할지로 여론이 뜨겁다. 국가안보나, 국내 관련 기업들 충격을 걱정하면 마땅히 반대할 일이다.
2009년 8월 한국토지공사 산하 토지박물관이 일제의 항일의병 진압작전(1907~1909년 즈음)을 기록한 <진중일지(陣中日誌)>를 공개한 적 있다. 이 문서에는 5만 대 1 축척의 당시로선 ‘고정밀 지도’ 25장이 첨부돼 있다. 앞서 약 30년 전부터 몰래 조선 측량에 나선 일제는 바위가 어디 있는지까지 지형지물을 표기했고, 이를 토대로 의병을 토끼몰이해 토벌하고 말았다. 위기 때는 지리정보에 국민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국부 유출’ ‘데이터 주권’ 같은 애국심에만 호소해선 일을 그르칠 위험도 따른다. 길게 볼 때, 산업 활성화와 신기술 도입을 가로막지 않는 게 결국엔 더 이로운 것은 아닌지 짚어보자.
구글, 애플 등이 고도화된 지리정보 관련 자율주행이나 드론배송 같은 서비스를 할 경우 국내 스타트업·벤처 등에 기회의 장이 열릴 수 있을 것인가 따져야 한다. “아직 우버 같은 서비스도 제대로 안 되고, 일본이 아니라 우리가 갈라파고스화를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하는 소비자들 비판이 적잖다.
국내 산업 보호가 네이버나 카카오, 티맵 같은 일부 ‘대기업 지갑 지키기’로 변질돼서도 안 된다. 이번 이재명 정부의 요직에 네이버 출신들이 더러 있어 유념할 부분이다.
이번 논란은 간단하다. ‘국가적 비용’과 ‘사회적 편익’을 비교, 형량하면 된다. 다음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논의될 수도 있다. 우리도 마땅히 굵직한 걸 챙겨야 한다.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는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돌릴 수 없으니, 빼앗길지언정 내어주지는 마시오”라고 했다. 그저 내어줘선 안 된다. 여차하면 되돌리는 조건을 꼭 내걸기 바란다. ‘최소한의 예의’, 즉 지도 서버를 국내에 두는 등 구글 측의 투자나 세금 납부 등을 선결조건으로 세워야겠다.
그럼에도 관성적 애국심 타령이나 ‘국산 장려운동’은 스스로를 우물 안에 가두는 격일 수 있다. ‘국부’는 시민들이 최대한, 제대로 향유해야 참가치가 있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