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음이 만발하니
이세보(1832∼1895)
녹음이 만발하니 백화가 시기로다
꽃이 녹음되고 녹음이 단풍이라
아마도 사시공도(四時公道)는 광음인가 하노라
-풍아(風雅)
시간은 공평하다
천하가 녹음에 뒤덮이니 한때 사랑을 받았던 뭇 꽃들이 시기를 한다. 그러나 꽃의 전성기가 지나 녹음이 온 것이고, 이제 머지않아 녹음은 단풍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사계절 변함없는 공평한 이치는 시간이 아니겠는가?
입추, 말복 다 지나고 처서가 모레인데도 폭염의 기세는 꺾일 줄을 모른다. 참으로 힘든 올여름이다. 그러나 이 여름도 결국 시간의 힘에 밀려 떠나고 아름다운 가을 단풍이 우리를 맞을 것을 알기에 우리는 견딜 수 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가을날’
『풍아』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세보의 시조 437수를 수록한 시조집이다. ‘풍아大’ ‘풍아小’ ‘시가’의 3권으로 되어 있으며, 고시조 시대 가장 많은 작품을 실은 개인시조집이다. 소개한 작품은 ‘풍아 392’이다.
유자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