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생은 정치조직일 수 없는가? 아니다. 그러한 법은 없다. 학생은 언제든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으며, 대학 역시 정치적 공간이다. 그러나 현재 의과대학생들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렸다. 2024년 2월, 정권에 의해 의대 정원이 3058명에서 5058명으로 갑작스레 확대되면서 이들은 장기간 강의실 밖에 머물게 됐다. 그 결과 2025년 5월9일 교육부는 전체 의과대학생의 42.6%(8305명)가 유급, 0.2%(46명)가 제적 대상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처럼 심각한 상황조차 거대 정치 뉴스 속에 묻히고 있다. 그렇게 시작도, 끝도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그들은 휩쓸렸다. 자의든 타의든, 이제는 스스로를 ‘조직’해야 하는 국면에 놓인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몇명이 유급되고 몇명이 제적됐는지를 보여주는 수치조차 뉴스에서 스쳐 지나가고, 시민 다수는 이 사안에 오래 주목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오히려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목격되기도 한다. 이는 의대생들이 개별적 존재로 보이지 않고,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어떤 무리가 집단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 집단은 정치적 대상으로 전환된다. 정치란 곧 힘의 역학이며, 주도권의 이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의대생 집단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정치조직화된 셈이다.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는 수업 거부 이후 유급 및 제적 상황에 대해 각 대학 대의원들과 논의하고 법적 자문 등 여러 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집단 수업 거부가 강요로 이어졌을 가능성과 학습권 침해를 언급하며 엄중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대립은 정의 대 질서, 연대 대 법의 구도로 읽히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이번 사태가 시민들로 하여금 ‘어디까지가 강요이며, 어디까지가 자율적 선택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고, 각종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상황의 출발점이 긴밀한 논의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강행된 정권의 정책 시행, 곧 아무런 대비책 없이 의과대학 신입생을 2000명이나 증원한 데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의대생 집단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다. 물론 그 비난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커뮤니티의 익명 공간에서 드러난 이탈자에 대한 비난은 단일대오의 강박과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를 모든 의대생의 행위로 일반화하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런데, 두 번째 우려는 바로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실제로 내부에 전체주의적 성향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우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는 사회적 삶의 에너지가 ‘상호작용 의례의 사슬’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감정적 에너지다. 도덕적 행위 능력은 선험적이거나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상호작용과 정서적 지지 속에서 축적된다. 즉 도덕적으로 말할 수 있는 힘은 감정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생성되며, 그 기반이 무너질 때 도덕적 침묵이 발생한다. 의대생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정권 혹은 정치세력이 ‘어떻게 의대생 집단의 감정적 에너지를 고갈시켰는가’이다. 만약 이 고갈이 계속된다면, 의대생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내부 단결을 지향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불행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나는 얼마 전 의대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의과대학의 강의가 얼마나 세심하게 기획되고, 이들이 얼마나 깊이 있는 사고와 훈련을 받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정성과 준비는 졸속으로 추진된 의대 정원 확대 정책으로 인해 무너졌고, 작금의 사태를 초래했다. 또한 그 많은 학생의 땀과 노력의 시간이 일순간 피해자의 지위로 내몰리고, 나아가 가해자의 위치로까지 전환되는 일련의 과정을 목격했다.
의대생은 정치조직일 수 있다. 단, 그것은 ‘이익’ 집단이 아니라 ‘권리’ 집단을 표방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권리는 마땅히 인정받고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권리에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그 책임은 단순히 법에 기대거나 직업윤리 선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회적 정당성을 설득할 수 있는 책임이어야 한다. 나는 그들의 가능성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