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계엄을 선포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린 전 대통령을 배출한 당에서, 그 대통령 밑에서 장관으로 일한 사람을 후보로 선출한 다음 그 후보를 새벽에 다시 갈아치웠다는 사실에서는 어떤 일관성이 감지된다. 민주주의적 과정 같은 건 무시해도 된다는 일관성이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계엄의 책임을 져야 할 총리를 새 후보로 옹립하기 위해서라니. 쏟아져나오는 뉴스를 보며 자못 불쾌해진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리라.

사태를 바라보는 시민으로서 힘이 빠지는 지점은 이처럼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밀어붙인 결정이 지리멸렬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진지한 정책 제안과 공약 토론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다. 행정학 연구가 최태현이 쓴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2023)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 시대의 슬픔은 너무나 하찮은 것들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절망이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찮음이 우리를 굴욕스럽게 만드는 것이지요. 가짜뉴스, 의미 없는 말싸움, 무능력한데 탐욕스러운 리더 등으로 희망과의 접점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절망해야 하는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는 결국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힘이 우리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낙관하지 않되 희망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민주주의의 역설을 긴 분량으로 풀어낸 뒤에 나오기에는 얄궂은 주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주문이라는 점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저자의 주장처럼, 주류로부터 소외된 곳까지 공공성과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세계 안에서도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상상하는 ‘마음의 근육’이 필요할 테다. 다가올 세계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함께 생각하며 혼란을 버텨나가야 할 시기다.
김겨울 작가·북 유튜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