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이오주 데이턴의 미국 국립공군박물관은 라이트 형제의 고향에 자리 잡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곳에는 인류가 하늘을 향해 품었던 꿈의 궤적이 초기 비행기부터 스페이스 셔틀에 이르기까지 생생히 전시돼 있다. 공기가 희박한 고산 지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해, 극지와 사막, 우주 공간까지 인간의 상상력이 닿는 곳마다 그 발걸음은 이어져왔다.
하늘을 나는 꿈은 인류의 오랜 열망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는 밀랍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추락했다. 그는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새의 날개를 관찰하며 비행 장치를 설계했고, 그의 실패는 오히려 수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 마침내 1903년, 데이턴에서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던 라이트 형제는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한다. 불과 11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비행기는 정찰과 폭격, 물자 수송의 수단으로 급속히 진화한다. 박물관을 거니는 동안 설명할 수 없는 비애감이 밀려왔다. 인간은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평화에는 미치지 못한 채 서로를 파괴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하늘을 날고 우주를 탐험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연결하는 일에는 실패하는 걸까?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말했다. “이상한 것이 많다지만, 인간처럼 이상한 존재는 없다.” 여기서 ‘이상한’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데이논(deinon)은 ‘경이로운’으로 번역할 수 있고 ‘무서운’이라고 새길 수도 있다. 인간은 그만큼 복합적이며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다.
성경 속 욥은 인간의 모순을 통찰하며 이렇게 말한다. “광부들은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며,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은과 금을 캐낸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사자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으로 들어간다.” 인간은 짐승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향하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의 지혜는 어디에 있으며, 슬기는 어디에 있는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인간이 서로를 아끼며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하는 이유는 땅만 바라보며 살기 때문은 아닐까? 큰 세계를 잃어버리면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 높음의 감각을 잃으면 왜소해지고, 맑음의 세계를 잃으면 더러워진다. 종교조차도 초월을 보여주기보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복무하면서 길을 잃고 있다. 고난은 때로 우리를 일상의 틀 밖으로 이끌며,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 위대한 정신은 종종 시련을 통해 형성된다. 고난은 우리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깊은 세계로 이끄는 힘이 된다.
유대교 전승에 따르면, 신이 인간과 숨바꼭질을 했을 때 인간은 어디에서든 신을 찾아냈다. 바다, 하늘, 땅속… 인간의 상상력은 모든 곳을 뒤졌지만, 신은 끝내 한 곳에 숨었다. 바로 인간의 마음속이었다. 거기에서는 인간이 그를 찾지 못했다. 초월을 잃어버린 인간은 결국 자기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게 된다. 그때 인간은 욕망의 포로가 된다.
오늘날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진보할수록 인간의 내면은 점점 공허해지는 듯하다. 인공지능(AI)이 열어가는 세상은 새로운 가능성과 동시에 깊은 불안을 안겨준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호모 데우스’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정작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덕목들을 잃어가고 있다. 아낌, 존중, 이해, 사랑으로 만들어가는 평화로운 세상의 꿈은 위태롭기만 하다.
그러나 이 꿈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꿈은 현실의 중력에서 우리를 해방해 더 높은 세계로 도약하게 하는 힘이다. 이카로스의 오만이 아닌, 다빈치의 상상력과 라이트 형제의 도전 정신, 끝내 포기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늘을 나는 기술보다 더 절실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기술의 지배가 전면화되는 지금, 우리는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