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부 유랑의 시작 / Learning to Roam
말라야에 찾아온 전쟁 / War Comes to Malaya
전쟁이 말레이반도에 이르기 전에도 그 메아리는 4년 넘게 울려오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1936년 중국에 잠깐 다녀온 직후 그곳에 전쟁이 터졌다. 부모님과 친구들의 대화에 늘 전쟁 이야기가 나왔고 우리 집 밥상에서도 중요한 화제였다. 중국 귀환은 당분간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은 더 퍼져나가는 것 같았고, 그 방향은 이포 중국인 대다수의 고향인 남방이었다. 1939년부터는 유럽의 전쟁 소식이 매일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전쟁이 결국 말라야에도 찾아올 것이 확실해 보이게 되었다. 아버지가 뉴스를 듣기 위해 라디오를 사 오시는 것을 보며 사태가 심각함을 알아챘다.
[역주: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만주국의 거점을 만든 일본은 중국과 저강도전쟁을 계속하다가 1937년 7월 전면 침공에 나섰다. 몇 달 사이에 연안 지역을 모두 빼앗긴 국민당정부는 충칭으로 옮겨가 장기 항전을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1939년 9월에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전투가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지 지도책으로 확인하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 되었다. 새로운 지명을 들을 때마다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전쟁에 시달리는 지역들과 내가 직접 맺어져 있음을 느끼면서 전쟁이 덜 무섭게 되었다. 충칭과 런던 폭격 소식을 거의 동시에 들으며 충격을 받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전쟁이 진짜로 세계대전임이 더 확실해졌다.
1939년 일본군이 광저우와 하이난섬을 잇달아 장악하자 그 기세가 더 남쪽으로 향할 것을 사람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발판으로 동남아 다른 지역 공략에 나설 것을 영국인들은 알고 있었다. 비시 정권의 프랑스는 일본군을 막을 수 없었고, 영국은 말라야 방어를 위한 준비에 힘을 썼다.
학교에서 우리는 싱가포르 해군기지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들었고, 선생님들은 일본군을 막을 능력을 영국이 가졌다고 믿고 있었다. 영국군이 어떻게 그리 빨리 제압당했는지 설명하는 책들이 전쟁 후 쏟아져나올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영국은 일본군이 태국을 통해 육로로 북부의 말레이 국가들을 공격할 것만을 걱정하고 해상 공격의 대비에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에 방어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것이다.
[역주: 1941년 12월 일본은 진주만 공격과 함께 동남아시아 진공을 시작했다. 진주만에서 미국 해군력의 궤멸 때문에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도 해군력의 우세를 누릴 수 있었다.]
일본의 동맹국들이 승리를 거두고 나치 독일은 소련 침공을 시작했다. 일본의 말라야 공격도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사람들이 대개 생각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1941년의 영국에게 일본군을 막아낼 충분한 힘이 있다고 낙관하고 있었고, 연말까지 나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12월에 일본군이 북쪽으로부터 쳐들어오기 시작했고 며칠 안 있어 이포에 폭탄이 떨어졌다. 부모님은 서둘러 우 선생 가족과 함께 도시를 떠났다. 탄종 투알랑 마을 바깥의 주석광산과 고무농장에 숨어 지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동네 중국인 학교 이사장인 주인이 우 선생과 아버지와 아는 사이여서 도와준 것이었다.
세 주일 동안 벌목장에서 지내다가 일본군이 가까이 올 때는 정글 속의 임시 숙소로 옮겨가기도 했다. 벌목장에 일본군 몇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남쪽으로 진격하기 바빠서 아무도 해친 일이 없었다. 그곳 생활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고, 아이들이 정글 주변을 돌아다니며 동물과 식물의 관찰에 열중하던 생각만 난다. 심한 말라리아에 걸린 일이 확실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유증으로 1년 내내 학교도 다니다 말다 하게 되었다. 며칠 동안 고열이 계속되어 어머니가 걱정했으나 다행히 키니네가 있어서 나을 수 있었다.
1942년 신정 무렵 벌목장을 떠나 이포에 가까운 석회암동굴 지대로 옮겼다. 많은 사람이 피신해 있었고 동굴에서 지내는 보름 동안 일본군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곳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 신기한 산 모양, 그리고 좁다란 입구가 뜻밖의 넓은 공터로 이어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동굴 중 큰 곳에는 온갖 조그만 건축물이 지어져 있었고 우리는 그중 두 개를 쓰고 지냈다.
어떻게 구하는지 식품도 식수도 있었고 외부의 위협도 없었지만 그런 이상한 곳에서 사람이 살기도 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숲속과 산속에서 지낸 시간은 짧았고 위험도 겪지 않았으나 그 후 몇 년간 주거부정 상태의 시작이었다. 두 집 가족에게 돌아갈 집이 없고 당장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소유물의 전부라는 걱정스러운 말씀을 듣던 기억이 난다.
1942년 1월 중에 이포의 일본 부대는 관리들의 협력을 얻어 기본 질서와 행정업무를 회복했다. 우 선생과 아버지는 새로 지낼 집을 구하러 도시에 들어갔다. 정부에서 제공하던 공공주택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신도시를 알아보았다. 우리는 우 선생 가족을 따라가 점포건물 1층의 방 하나에서 지낼 곳에 세를 얻었다. 중국인 약재상의 소유 건물로, 새 시장 바로 옆의 짧은 길에 면한 집이었다. 부모님 침대가 있고 나는 바닥에서 잤다.
안전한 곳을 찾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얼마 후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 소식과 뒤이어 수천 명 중국인의 학살 소식을 들었다. 싱가포르 외에도 이포에서 멀지 않은 킨타 지역 등 여러 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포 자체는 그런 험한 일을 면한 것이 기적 같은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왕징웨이(汪精衞, 1883-1944)의 처남 찬키예추(陈继祖)가 이포에 살며 사업을 하고 있어서 그 덕분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역주: 1905년부터 동맹회 활동을 시작한 왕징웨이는 1925년 쑨원이 죽을 때 후계자 물망에 올랐으나 장제스에게 밀려났다. 그 후 당내에서 독자노선을 견지하고 있다가 일본 침공 후 괴뢰정부 수반을 맡았다. 그 부인 첸비쥔(陳璧君)은 말라야의 페낭 출신이었다.]
나는 우 선생 댁 세 자녀와 함께 살림 돕기에 나섰다. 새로운 생활방식이고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몇 주일 동안 시장 바깥에 좌판을 벌이고 우 선생이 구해 오는 비누와 장유(醬油) 등 잡화를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이 시장에 와서 우리 좌판 정면으로 멀지 않은 곳에 높은 대를 세우고 사람 머리 몇을 올려놓았다. 약탈 행위로 처형된 자들의 머리라며 일체 범죄를 엄단한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얼어붙었다. 파리떼가 몰려들었고, 사흘 후 악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치워졌다. 그때부터 시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고 부모님들은 좌판을 거뒀다. 우리 셋은 자전거로 주택가에 가서 비누 따위를 파는 방문판매 사업에 나섰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부모님들이 우리의 은퇴를 결정하면서 짧은 세일즈맨 경력이 끝났다.
몇 주일 후 또 한 차례 끔찍한 광경에 마주쳤다. 강변으로 가는 길가, 전에 다니던 학교 부근의 조그만 공원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보고 운동경기나 공연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공개처형이었다. 젊은 중국인 하나를 공원 복판으로 데려와 무릎 꿇리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그래도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일본군 장교가 칼을 쳐들더니 죄수의 목을 내리쳤다. 한 방에 못 끝내 두 번째 내리치고야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군중은 한 차례 비명을 터뜨린 후 정적에 빠졌다. 장교는 부하들이 시체를 치우기 전에 일본어로 뭔가 소리쳤다. 나는 너무나 무서웠고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그런 참혹한 장면을 다시 볼 일은 없었지만, 인간이 잔인한 행위에 얼마나 빨리 익숙해지는지 알게 되었다.
두 달 후 부모님은 두 집 가족이 조그만 집 한 층에 사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다른 장소를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도시 바깥의 마을로 가서 호 씨 가족과 함께 몇 달 지냈다. 그리고 시내로 돌아와 이번에는 구도시에 있는 호끼엔협회(福建會館)의 방 하나를 빌렸다. 협회는 큰 건물이었고, 우 선생 댁 아이들이 다닌 페이난 소학교도 그 안에 있었다. 아버지와 우 선생이 협회 간부들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일본군 진주 후 학교가 닫힌 상태여서 방들이 비어 있었다. 학교 교장을 전에 지내고 협회 일을 보며 그 건물에서 살고 있던 코르 씨도 아버지가 아는 사람으로, 자기네 방 하나를 빌려주었다. 이번에도 아주 작은 방이었고 나는 바닥에서 잤다.
건물 위치가 일품이었다. 우 선생 댁 아이들이 이 학교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들었었다. 한쪽에는 킨타 강, 다른 쪽에는 시내 최고의 운동장인 파당이 있었다. 파당 건너편 조그만 둔덕 위에는 영국인 전용클럽이 있었다. 우리 건물 오른쪽에는 가톨릭학교인 성 미카엘 학원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고급 가게들이 늘어선 벨필드 가가 펼쳐져 있었다.
일본군은 우리 이웃의 아름다운 성 미카엘 건물을 징발해서 주 정부 청사로 쓰고 있었다. 우리가 무슨 재수로 정복자들 턱밑에 자리 잡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덕분에 보안이 확실한 곳에서 살게 된 것은 좋은 일인데, 몇 안 되는 남자 주민들이 야경을 맡아야 한다는 부담이 따랐다. 야경 책임 중에는 자정부터 새벽까지 길모퉁이에 서서 지키는 일이 있었다. 그 일은 당번을 정해 맡았다. 거기 사는 동안 아버지도 몇 차례 당번을 섰고, 한 번 편찮으실 때는 내가 대신 섰다. 열두 살이지만 나이에 비해 키가 컸고 기다란 작대기를 들고 서 있으면 그럴싸한 야경꾼으로 보였다.
아버지가 나를 밍테(明德) 소학교에 넣어주셨다. 벨필드 가를 따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학까협회(嘉應州會館)가 세운 학교였다. 나는 상급반에 들어갔다. 학까족 선생님들의 국어(國語)는 자기네 식 국어였다. 새로운 경험이었고 집에서 읽던 고전한문과 다른 말로 산수와 지리, 그리고 역사를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쳐야 했고, 그 과목을 늘리기 위해 말레이인 교사 두 명이 오면서 아버지가 고민에 빠졌다. 우리는 아침마다 일본 국가를 불러야 했고 일본 애국가요를 배워야 했다. 내가 그런 걸 배워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서 빼내셨다. 그래서 내 자가학습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로 사귄 학교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서운하기는 했으나 할 일을 스스로 찾는 생활에 나는 곧 익숙해졌고, 그로부터 3년간 학교 그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뛰놀며 많은 저녁 시간을 보냈다. 영국인들이 크리켓과 럭비 시합에 쓰던 운동장이 개방되어 우리 모두 공놀이와 연날리기를 마음껏 하며 나쁜 짓에 끌려들 기회가 적게 되었다. 킨타 강둑을 걷다가 얕은 강변에 내려가 발 씻기도 좋았다.
코르 씨 부부와 그 집 2남3녀와 함께 몇 달을 함께 살았다. 호끼엔(푸젠성 남부 출신)이지만 국어(國語)도 말하는 집안이었다. 큰아들은 나보다 몇 살 위, 작은아들은 몇 살 아래였다. 세 딸은 나랑 비슷한 나이에 친절한 성격이어서 내게 호끼엔 말도 가르쳐주고 어머니 도와드리는 방법도 훈수해 주었다. 농수산물시장의 장보기, 식사 후의 설거지 등이었다. 그런 일 맡아줄 여동생이 한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타고난 효자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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