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 출신 차량부품 영업사원 김성철 씨
탈북 과정서 어머니 사망 소식 접해
탈북민이란 이유로 장모님이 결혼 반대
"사랑하는 아내가 사는 이곳이 고향"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한적한 주말 경기도 성남 분당구의 거리 끝에 있는 한 카페에서 김성철 씨를 만났다. 평소 같으면 늦잠을 잤을 시간이지만, 그는 인터뷰를 위해 서둘러 두 아이를 챙기고 아내와 함께 나왔다. 팔과 다리에 매달리는 아이들을 아내에게 부드럽게 떼어 맡긴 그는 조용히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두만강 인근의 무산이었다. 형과 함께 학교에 다니며 자라던 그는 열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 없는 집에서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어머니는 안간힘을 다했지만, '고난의 행군'이 끝나지 않은 2000년의 시간을 버티는 일은 너무 벅찼다. 어느 날, 어머니는 "6개월 치 식량을 준비해 두었으니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이후 성철 씨와 형은 어머니가 남기고 간 식량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1년을 살았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형과 함께 고아원에 보내졌다. 약속했던 6개월이 지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마다 고아원 마당의 큰 쇠가마에서 끓는 죽 냄새에 잠을 깼고, 또래 친구들을 마주치지 않으려 산길로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고아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버텼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안전부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중국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모아둔 돈으로 빵을 사 들고 어머니를 보러 갔다. 울타리 너머 죄수복을 입은 어머니의 모습은 낯설고도 가슴 아팠다.

노동단련대에서 나온 어머니는 "두 아들 중 한 명만 데리고 중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겁이 없던 성철 씨가 따라나섰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중국인 의붓아버지가 있는 낯선 집이었다.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삶이 처음엔 낯설 만큼 행복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형과 고향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결국 그는 짐을 싸 들고 홀로 고향으로 향했다. '엄마를 찾으러 중국에 갔다가 찾지 못해 돌아왔다'고 하면 조국이 자신을 받아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조국은 냉정했고, 곧 폭력과 억압이 이어졌다.
다행히 아직 학생 신분이던 그는 곧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그곳은 이제 안식처가 아니었다. 성철 씨는 탈출을 결심했고, 어머니를 도왔던 이모를 찾아가 탈북길에 올랐다. 이번엔 성공이었다. 어머니 품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중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웃의 신고로 다시 공안에 붙잡히고, 북송과 탈북을 두 번 더 반복해야 했다. 결국 어머니의 지인 도움으로 한국행에 오를 수 있었다. 태국에 도착했을 즈음, 그는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다. "아들만큼은 안전한 곳에서 살기를 바랐을" 어머니의 뜻을 가슴에 새기며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한 그는 생계를 위해 백화점 주차, 서점 아르바이트, 치킨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공부의 꿈을 키웠다. 스물네 살, 늦은 나이였지만 열정은 늦지 않았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단기간에 통과하고 대학에도 합격했다. 국제지역학 전공으로 영어의 벽에 부딪혔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8개월간의 어학연수를 통해 영어 실력을 키우며 자신감을 얻었다.
졸업 후 무역회사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사장은 그의 리포트를 읽고는 매번 던져 버렸다. 울분이 치밀었지만, '탈북민으로서 나쁜 인상은 남기지 말자'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만둘 때는 박수칠 때 그만두자'는 마음으로 성실히 일하던 중, 고객사의 제안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사장의 인정을 받았다. 모두가 그의 노력을 응원하던 그날, 성철 씨는 새로운 목표를 위해 퇴사를 결심했다.

창업은 쉽지 않았다. 지인의 소개로 자동차 부품 영업직에 들어갔다가 3년 후 결혼과 함께 이직했고, 지금은 영업부 과장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평균 이상의 연봉으로 가정을 든든히 지켜가며 살아간다.
그토록 여러 차례 북송을 겪었지만, 그가 늘 돌아가던 곳은 고향 무산이었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 그에게 새 고향은 대한민국이었다. "당신의 고향은 어디인가요?"라는 질문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이곳이 제 고향입니다."
그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뽀얀 피부에 미소가 고운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장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탈북민이라는 이유였다.
대화마저 끊긴 장모님께 그는 표현으로 마음을 보여드리기로 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떤 꿈을 꾸는지를 담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중간 중간 전 미국 대통령 부시, 외교부 장관 등과 함께한 사진을 슬라이드에 담았다. 발표가 끝나자 장모님의 마음은 열렸다. 지금은 성철 씨가 찾아올 때마다 따뜻한 미소로 맞이해 주신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인터뷰의 마지막, 앞으로의 꿈을 묻자 그는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고아 시절의 아픔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외 고아원과 교육 지원 사업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수많은 시련을 딛고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삶은 오늘도 누군가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어 빛나고 있다.
<뉴스핌-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