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00일, 자유무역 80년 무너뜨리다…美, WTO 종식 선언

2025-08-08

전 세계를 향한 상호관세가 발효된 7일(현지시간). 미국의 무역 정책을 총괄하는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USTR) 대표는 30년을 이어온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종식을 선언했다. 자유무역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는 ‘트럼프 라운드’라고 명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주도의 연합국이 자유경제 질서 확립 방안을 논의하며 1995년 출범시킨 브레튼우즈 체제 50년과, 이후 현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을 이루며 30년을 이어온 WTO 체제 등 80년의 자유무역 질서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불과 200일만에 종말을 고했다는 선언이다.

그리어 대표는 이날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명목상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며 166개 회원국의 무역 정책을 규제하도록 설계된 WTO는 유명무실해졌고 더이상 세계 질서를 유지할 수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고 썼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새로운 트럼프 라운드를 목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트럼프 라운드의 핵심은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이라는 수단과 목표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새로운 체제를 만든 원동력과 향후 발생할 분쟁을 해결할 사실상의 유일한 수단으로 무차별적 관세를 내세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소비 시장(미국)에 진출할 수 있는 특권이 강력한 ‘당근’이고, 관세는 강력한 ‘채찍’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스스로 ‘미국 해방의 날’로 명명한 지난 4월 2일 일방적인 상호관세를 발표했다. 관세는 발효 직후 유예한 뒤 개별 국가와의 협상이 시도됐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불합리한 압박을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고율의 관세를 일방적으로 정한 서한을 발송하고 나서야 '울며 겨자 먹기' 심정으로 관세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미국 언론마저 ‘약탈’과 ‘협박’이란 표현을 썼다.

그리어 대표는 그럼에도 이날 기고문에서 “미국의 새로운 접근 방식은 합의 이행을 모니터링하고 불이행 시 더 높은 관세를 신속하게 부과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더 강한 채찍질이 가할 거란 의미다. 특히 징벌을 판단할 주체 역시 더 이상 WTO가 아닌 미국이 될 거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종말 선고를 받은 WTO는 자유무역질서 확립을 위해 1948년 설립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대체한 글로벌 교역의 핵심 기구다. 1980년 들어 잠정협정 수준이던 GATT를 우회해 선진국들이 보호무역을 남용하자, 8년간 이어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거쳐 1995년 1월 출범했다. 핵심은 회원국들의 의무이행을 뒷받침할 강제집행권 등 제재 수단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때인 2019년 WTO내 분쟁해결기구(DSB)가 위원 3명 중 2명의 임기가 만료되자 WTO가 중국 편을 들며 미국에 불리한 판정을 내린다며 상소기구 위원 선임을 거부했다. 위원 선임을 위해 만장일치 찬성이 필요한 점을 악용한 일종의 ‘알박기’로, WTO의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킨 장본인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이란 의미다.

그리어 대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채 미국 스스로 붕괴시킨 WTO 체제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미국은 불과 몇 달 만에 수년간 성과를 못낸 WTO보다 더 많은 해외 시장 접근성을 확보했다”고 했다. 특히 “자유무역 근본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이단으로 치부했던 것들이 이제는 상식이 돼 가고 있다”며 자유무역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움직임을 상식이라고 했다.

관세로 ‘트럼프 월드’를 완성했다는 선언에 대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이날 자신의 블로그에 ‘황제의 새 무역 협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관세도 나쁘지만, 착각에 빠진 대통령은 더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특히 “유럽연합(EU)이 내놓기로 합의한 6000억 달러는 내가 원하는 어떤 것에든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선물”이라고 한 데 대해 “유럽 국가 정부는 민간에 투자 방향을 지시할 명령경제 체제가 아니고, 협상을 진행한 EU 집행위원회도 회원국에 이를 지시할 권한이 없다”며 “이는 무역 합의가 아니라 ‘벌거벗은 황제’의 새 옷”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의 관세는 지금도 대미 상품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3%에 불과한 EU의 미국 시장 의존도를 더 낮추게 될 것”이라며 “더 나아가 유럽과 다른 교역 상대국들의 보복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주창한 신(新)체제에 대응한 반(反)체제 국가들의 결집이 가시화되고 있다. 반대 세력의 중심에는 미국이 견제하려는 중국이 위치해 있고, 중국을 중심으로 나란히 50%의 ‘관세 폭탄’을 맞은 인도와 브라질이 밀착하는 기류다.

브라질 대통령실은 이날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통화했다”며 “두 정상은 글로벌 경제 상황과 일방적인 관세 부과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룰라 대통령은 전날 인터뷰에서는 “중국과 인도에 먼저 연락할 것”이라며 중국 중심의 비서방 경제 연합체인 브릭스(BRICS)를 대(對)트럼프 전선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리어 대표 역시 “WTO 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는 국영기업과 5개년 계획을 내세운 중국”이라며 미국이 주도하려는 새 체제가 중국을 겨냥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의 압승을 자신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중국에 145%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하며 중국의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은 125%의 맞불 관세로 대응하는 한편, 희토류 등의 자원을 무기로 맞섰다.

관세 대결이 ‘치킨 게임’ 양상으로 전개되자 양측은 90일간 초고율 관세를 유예하는 ‘관세 휴전’에 합의했다. 유예 종료일은 오는 11일이다. 휴전 종료를 앞두고 양국은 지난달 28~29일 스웨덴 스톨홀름에서 열린 3차 고위급 무역 협상에서 관세 부과를 재차 유예하는 데 잠정 합의했지만, 이를 공식화한 중국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잠정안에 아직 서명을 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신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한다는 이유로 인도에 25%의 ‘2차 관세’를 부과하며 중국에 대해서도 징벌적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을 시사하며 중국을 간접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도 이날 폭스 인터뷰에서 중국에 러시아 원유 수입에 대한 보복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에 대해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다”며 중국을 압박했다. 그러면서도 “양측이 합의에 도달해 90일 추가 (관세 유예를) 연장하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양측 모두 출혈을 감수해야 할 전면전을 또다시 미룰 가능성을 시사한 말로 풀이된다.

외교 소식통은 이러한 움직임과 관련 “많은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에서 결국 미국이 승리할 거라고 보기 때문에 불합리한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며 “특히 한국을 비롯해 미국과 경제 및 안보 등 전분야의 협력이 절실한 동맹국들은 최소한 ‘정 맞는 일은 피해야한다’는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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