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TA·B-1 비자로 취업활동 관행 제공
정부, 미국과 비자 제도 개선 협의 계획
캐나다·멕시코·호주 등 5개국도 적용
대미 투자 대폭 확대, 유리한 환경 판단
반이민 정서 높아진 상황이라 미지수

미국 이민 당국의 한국인 무더기 구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비자 발급 제도 개선이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다. 현지 취업이 불가능한 비자를 통한 취업을 묵인해온 관행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특별 취업비자 마련 등 제도 개선을 미국에 적극 제기한다는 방침이다. 한국의 대미 투자가 확대하는 현시점이 이런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적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 이민 당국이 지난 4일(현지시간)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공정률 97%)에서 체포한 한국인 300여명은 전자여행허가(ESTA)나 B-1 비자를 발급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ESTA는 비자 없이 90일간 체류할 수 있으나 취업은 할 수 없다. B-1 비자는 회의 참석·계약 협상·단기 훈련 등은 가능하나 건설 현장에 취업해 노동력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그간 관행적으로 이뤄졌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 참석해 ‘ESTA나 B-1 비자로 일하는 게 현실인가’라는 질의에 “유사한 경우가 상당히 있다는 걸 현지 공관으로부터 보고받은 바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비자 체계 개선 방안을 미국과 논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날 미국으로 출국하는 조 장관은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등을 만나 한국인 석방 문제 해결과 함께 비자 문제도 협의할 예정이다. 조 장관은 현지 취업이 가능한 H-1B 비자의 한국인 할당을 확보하거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전문직 취업비자 할당(E-4 비자) 신설 등 여러 방안을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다른 국가에 전문직 취업비자의 특별 할당을 적용한 사례도 있다. 캐나다와 멕시코(무제한), 싱가포르(5400명), 칠레(1400명), 호주(1만500명) 등이다. 캐나다·멕시코·싱가포르·칠레는 1994~2003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협정 안에 비자 할당을 명시했다. 호주는 2005년 미국 내 입법을 통해 할당을 확보한 유일한 사례다.
정부는 현재 한·미관계를 비자 제도 개선에 유리한 환경으로 보고 있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과 한·미 정상회담 등에서 대미 투자 5000억달러(약 700조원)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대미 투자 실행을 위해 원만한 인력 제공이 필요하다고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 장관은 “대미 투자를 실현하기 위해선 비자 문제가 선결 과제라는 걸 미국 측에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도 긍정적으로 본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지금 이 나라에 배터리에 대해 아는 인력이 없다면, 우리가 그들을 도와 일부 인력을 (미국에) 불러들여 우리 인력이 배터리 제조든 컴퓨터 제조든 선박 건조이든 복잡한 작업을 하도록 훈련시키게 해야 한다”라며 제도 개선을 시사했다.
정부는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첫 정상회담에서 신뢰관계를 쌓은 점에도 기대를 거는 것으로 보인다. 호주가 별도 할당을 확보한 배경에는 당시 양국 정상 간 긴밀한 유대를 바탕으로 미국 행정부가 법안 통과에 적극 협조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다만 과거와 달리 미국 내 반이민 정서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의 요구를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정부는 2012년부터 한국인에게만 최대 1만5000개 취업비자를 발급도록 하는 ‘한국 동반자법’ 제정을 위해 미국 정부와 의회를 대상으로 작업도 벌여왔으나 진척이 없었다. 지난 7월에도 미국 하원에 해당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