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필하모닉 대표가 낸 퀴즈

2025-05-08

이달 2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는 수식이 부담스럽지 않은 빈 필하모닉(빈필)의 대표와 인터뷰를 하던 참이었다. 빈필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전통을 지키던 빈필이 최근 달라졌다. 올해 1월에는 신년 음악회에서 최초로 여성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했다. 신년 음악회가 시작된 1939년 이래 처음이었다.

빈필의 대표 다니엘 프로샤우어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빈필의 수석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는 인터뷰에서 “2026년 신년 음악회에서 또 한 번 여성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작곡가를 맞혀보라”고 퀴즈를 냈다. 웃는 얼굴로 “기회는 한 번”이라고 했다.

86년 전통의 빈필 신년음악회

여성의 작곡 금했던 과거 딛고

내년에도 여성 작곡가 곡 연주

세상의 변화 보여주는 한 장면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우선 올해 1월 1일 빈필이 연주했던 작곡가는 콘스탄체 가이거(1835~90). 빈 태생으로 피아노·연기·작곡을 겸했던 재능 넘치는 예술가였다. 빈필은 가이거가 불과 12세에 썼던 ‘페르디난두스 왈츠’를 연주했다. 그렇다면 내년의 여성 작곡가도 오스트리아 태생일까? 적어도 독일어권의 작곡가일 것이다. 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일까? 하지만 맞혀보라고 할 정도라면 익숙한 이름일 가능성이 컸다.

여성 작곡가라면 21세기의 이름이 여럿 떠오른다. 러시아의 소피아 구바이둘리나(1931~2025)는 세계적 연주자와 연주 단체들의 표준 연주곡이다. 한국 태생의 진은숙(64) 역시 오케스트라들이 프로그램에 자주 포함시키는 작품을 여럿 가지고 있다. 20세기로 거슬러갈 수도 있다. 프랑스의 나디아 불랑제(1887~1979)는 피아졸라·글라스·번스타인의 스승으로, 여성 작곡가를 거론할 때마다 맨 앞에 선다.

하지만 빈필의 신년 음악회에서 이들의 작품을 연주할 리는 없다. 19세기의 왈츠 또는 그에 준하는 호화로운 음악이어야 한다. 이런 고민을 눈치챘는지 프로샤우어 대표는 “선두에 있는(leading) 작곡가”라고 힌트를 줬다. 퀴즈의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몇몇 후보를 제외하고 나니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독일권의 작곡가이면서, 현대적이지는 않고, 한국의 기자도 알만한 이름이며, 선도적인 여성 작곡가. 그녀의 오케스트라 작품이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피아노곡을 편곡이라도 해서 연주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름을 불러봤다. “클라라 슈만?”

프로샤우어 대표의 웃음이 터졌고, 오답이었다. “좋은 추측이었다”는 말과 함께 기회가 끝났다.

지금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로 더 잘 알려진 클라라 슈만(1819~96)은 당대에 로베르트보다 더 유명한 예술가였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에게 허락된 영역은 거기까지였다. 재연은 돼도 창작은 안 됐다. 클라라는 당시 프란츠 리스트도 놀라워했던 피아니스트였지만 남편이 작곡에 매진하고 맥주를 한잔하러 나간 사이에야 피아노를 만질 수 있었다. 클라라는 “여성이 감히 작곡을 꿈꿔서는 안 된다”는 기록까지 남기면서도 낭만주의 어법이 가득한 작품을 30여곡 남겼다. 그래도 오답은 오답이다.

프로샤우어 대표와 인터뷰 계기는 여성 지휘자였다. 빈필은 1860년 이래 처음으로 정기 연주회의 지휘대를 여성에게 허락했다. 지난 3일 지휘한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39)였다. 공연이 끝나고 6일에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2025-26 시즌 프로그램을 발표했는데, 그라지니테-틸라의 내년 4월 베를린필 데뷔 소식도 들어있었다. 여성 작곡가에 대한 클라라의 글이 지금 보면 이상한 것처럼, 여성 음악가에 대한 기사와 칼럼도 곧 해괴하게 보일 것이다.

빈필의 신년 음악회는 화려한 신전이다. 황금빛 공연장에 꽃이 가득 장식되고, 음악에 맞춰 색종이 폭죽이 터지기도 한다. 동시에 183년 빈필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매년 지휘자 선정이 세계적인 이슈인데, 빈필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명지휘자를 신중히 고른다. 여기에 여성 작곡가가 매년 등장한다는 것은 꽤 무거운 의미다. 빈 시내 곳곳에는 지금도 콘스탄체 가이거와 관련된 홍보물과 자료가 남아있다. 신년 음악회의 힘이다. 90여 개국에 중계되는 이 무대에 내년에는 어떤 여성 작곡가가 등장할까. 기자는 맞히지 못했지만 독자 중에는 정답자가 있으리라 믿는다. 세상의 변화를 함께 목도하게 돼 반가울 따름이다.

김호정 음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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