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 문명의 역사는 에너지 정복의 역사 그 자체다. 불을 다스린 최초의 순간부터 오늘날 원자로의 불을 제어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언제나 더 작고, 더 가볍고, 더 강력한 에너지원을 끊임없이 갈망해왔다. 이 장대한 진보의 서사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설계도이자 핵심 변수는 바로 '에너지 밀도'다.
단위 질량(㎏)이나 부피(ℓ)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응축돼 있는가를 나타내는 이 과학적 척도는 인류가 이룩한 모든 사회·경제적 도약의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에너지 밀도의 증가는 단순한 연료의 교체를 넘어 문명 전체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해 왔다.
◇낮은 밀도의 속박과 산업혁명의 해방
산업혁명 이전 수만년 동안 인류는 태양이 공급하는 에너지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주된 에너지원은 건조 목재(약 16.0MJ/㎏)와 식량, 즉 바이오매스였다. 이처럼 낮은 에너지밀도는 사회를 토지라는 물리적 공간에 단단히 묶어두는 족쇄로 작용했다. 도시의 규모는 주변 배후지에서 꾸준히 공급할 수 있는 식량과 땔감의 양에 의해 엄격히 제한됐으며, 문명은 매년 태양에너지가 저장되는 느리고 제한적인 순환 주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인구 증가는 곧 삼림 파괴와 자원 고갈이라는 위기로 이어지곤 했다.
18세기, 고갈되는 삼림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절실히 요구했고, 인류는 땅속에서 석탄(역청탄 기준 약 32.5MJ/㎏)이라는 해답을 찾아냈다.
목재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에너지밀도를 가진 석탄은 제임스 와트가 개량한 증기기관과 결합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변화인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인류는 처음으로 지표면의 한정된 '에너지 흐름'(flow)에서 벗어나, 수백만년간 축적된 지하의 방대한 '에너지 저장'(stock)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거대한 도약은 공장을 강가에서 해방시켜 도시로 집중시켰고, 철도는 국토를 연결하며 대량 생산과 폭발적인 도시화 시대를 열었다. 에너지밀도의 증가는 비로소 인류를 영토의 속박에서 풀어준 결정적 계기였다.
◇석유 시대의 확장과 인류 활동 반경의 세계화
20세기의 패권은 석탄보다 약 1.5배 더 높은 에너지 밀도(석유, 약 44.0~53.6 MJ/㎏)를 가진 석유(천연가스 포함)가 차지했다.
그러나 석유의 진정한 힘은 단순히 밀도 증가에만 있지 않았다. 인류는 고체인 석탄과 달리 '액체'라는 물리적 특성을 활용해 취급·운송·저장을 혁신적으로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 고밀도 액체 연료의 잠재력은 내연기관의 발명으로 완벽하게 폭발했다. 증기기관보다 훨씬 작고 가벼우며 효율적인 내연기관은 자동차와 비행기를 탄생시키며 개인의 이동성을 전례 없이 확장시켰다. 사람들은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전 세계는 유조선과 화물기로 촘촘히 연결되며 현대적 의미의 세계화가 완성됐다. 문명의 활동 반경이 마침내 지구 전체로 확장된 것이다.
바이오매스에서 석탄, 석유, 그리고 화학연료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원자력(우라늄-235, 약 144,000,000MJ/㎏)에 이르기까지, 에너지 밀도의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은 인류 문명의 발전 궤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더 작은 공간에 더 큰 힘을 응축시키는 능력은 사회 구조를 재편하고, 경제 성장을 가속하며, 인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확장해 왔다. 또 다른 미래 에너지로 주목받는 수소는 142MJ/㎏이고, 저장 매체인 리튬이온 배터리는 0.54~0.9 MJ/㎏이다.
◇진보와 안전의 조화…핵융합 발전으로의 도전
에너지 밀도의 지속적인 진화는 인류에게 풍요와 안락을 가져왔지만, 그 결과로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동시에 인간은 '안전한 나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것을 위협하는 요소에 대해 저항'하는 생존 본성을 유전자 속에 각인돼 있다.
즉, 에너지 밀도를 높여 풍요를 확보하는 것과 함께 주변 환경 변화로 인한 '나와 우리 가족의 안전한 공간'에 대한 위협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최근 대통령의 핵융합연구원 방원으로 핵융합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핵융합 발전은 이러한 이중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에너지 밀도 측면에서 가야 할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핵융합은 1920년 태양의 에너지원임이 밝혀진 이래로 인류가 도전해 온 새로운 분야다. 핵융합 발전에서 수소 1㎏이 생산하는 에너지는 1,008,000,000MJ/㎏로, 우라늄이 내는 에너지의 약 7배에 달한다. 핵융합 연료 1g은 석유 8톤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생성한다고 한다. 이는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차원의 '에너지 밀도 혁명'이다.
전 세계는 1998년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프로젝트를 탄생시키며 핵융합 발전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대한민국도 2003년부터 참여하고 있다. 비록 핵융합 발전이 아직 요원한 기술이며 ITER 완공 시기가 연기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지만, 인류 문명의 진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문명의 진보와 함께 인류 본성인 '안전'과 '생존'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에너지 확보에 인류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시기가 바로 앞에 와 있다. 에너지밀도는 과거 문명의 속도를 결정해 왔듯이, 미래에는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인류 문명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이상협 국가녹색기술연구소장
국가녹색기술연구소(NIGT)를 이끄는 소장으로서 데이터에 기반한 탄소중립 기술을 선별하고 국제협력 연계를 활성화하는 전략수립 기관으로 성장하는데 힘쓰고 있다. 현재 과기정통부 기후·환경연구개발사업 추진위원회 위원, 서울시 은평구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환경공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4년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근무하며 기후환경연구소 물자원순환연구단장을 거쳐 한국연구재단 국책연구본부 에너지환경기술단장을 역임했다. 152편 논문과 122건 특허를 보유했다.
환경부 장관 표장 2회, 환경기술 우수상, 미래창조과학부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후정책유공자 표창, 환경산업기술원 20주년 우수기술 50선을 수상했다.
2025년 과학·정보통신의 날 기념식에서 기후법 제정 등 대한민국 탄소중립 기술개발 전략 틀을 구축하고 기관 운영을 혁신해 정부의 탄소중립 녹색기술 정책 개발과 국제 협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기술훈장 웅비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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