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법원의 한 판사가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피고인을 항소심 재판 중에 구속하고 ‘혐의를 인정한다’는 취지의 자백이 나오자 곧바로 유죄를 선고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판사는 다른 형사재판에서도 재판 첫날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등 무리한 재판을 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대법원도 “구속이 신중하게 이뤄졌는지 의문”이라며 구속 직후 나온 자백을 근거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 “갑작스레 구속, 신중했는지 의문…자백에 신빙성 없다”
20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지난 3일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제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20년 10월 제주 서귀포시의 한 농로에서 트랙터를 몰다가 왕복 2차선 도로에 진입하기 위해 좌회전하던 중 왼쪽에서 직진해오던 오토바이와 충돌해 운전자를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A씨가 “좌우를 모두 살핀 뒤 진입했지만 오토바이를 보지 못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해 A씨가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2심을 맡은 제주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오창훈)는 두 번째 공판에서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A씨를 법정 구속했다. 재판 도중 구속된 A씨는 “교차로의 진입이 우선권이 없다는 재판장의 지적을 듣고 나에게 과실이 있음을 모두 인정하게 됐다”는 의견서를 냈다. 그러자 재판부는 바로 다음 재판에서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A씨가 갑자기 구속되자 압박감을 느껴 허위 자백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구속 직후 피고인은 일관되게 유지하던 입장을 번복해 갑자기 유죄를 인정했다”며 재판부가 A씨의 자백을 그대로 신뢰하지 말고 사실관계를 더 다퉈봐야 했다고 판단했다. 이어 “구속된 사람은 허위자백을 해서라도 자유를 얻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원심이 A씨를 법정 구속한 것 자체도 문제라고 봤다. “피고인은 공판기일에 모두 출석했는데, 객관적·외부적 사정변경이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구속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피고인의 지위나 처지를 고려해 신중하게 이뤄진 것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제주지법에는 형사 사건 항소심 재판부가 하나뿐이다. 재판장인 오창훈 부장판사가 무리한 재판과 판결을 하는 사례가 계속되면서 법조계 안팎에서 비판이 제기돼왔다. 앞서 오 판사는 윤석열 정부의 ‘간첩몰이 수사’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가해 경찰을 다치게 한 농민 등 2명을 항소심 재판 첫날 법정 구속하고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오 부장판사는 1심 집행유예를 뒤집고 실형을 선고하면서도 판결 전에 배석판사들과 합의를 거치지 않고, 피고인들을 향해 “어떤 소리도 내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 어기면 바로 구속하겠다”며 협박한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됐다. 대법원은 이 사건 상고심을 지난 3일 판결하기로 했다가 탄원서 등이 접수되자 하루 전날 판결 날짜를 무기한 연기한 상태다.
오 부장판사를 고발한 제주의 고부건 변호사는 “무리한 선고를 반복하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는 변호사들이 많지만, 피고인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대법원이 판결의 절차상 문제점을 바로잡아 이런 식의 재판이 계속되면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