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사이 쉼표 하나

2025-05-07

대한민국 헌법 127조 1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이 짧은 조항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를 놀라게 했다. 하나는 헌법이 무려 과학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있긴 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 과학이 지닌 헌법적 책임이 지나치게 협소하게 규정돼 있다는 점이다. 우리 헌법이 규정하는 과학의 가치는 ‘국민경제의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헌법에서 과학이란 단어는 1963년 헌법 개정 당시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과학은 국가 발전이란 대의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실용적 도구로 다뤄졌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다. 지난 수십년간 국가 지도자가 말하는 과학기술에서 사실 과학은 없었다. 그들이 과학기술이라 말할 때, 방점은 뒤의 기술에 찍혀 있었다. 정부 정책에서 과학은 그저 기술을 멋지게 포장하는 장식처럼 앞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 과학기술이라는 단어는 마라탕후루처럼 괴상한 합성어로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은 본래 성질이 전혀 다르다. 과학은 이해(Understanding)의 학문이다. 척추가 세워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한 이래로, 인류는 자신이 사는 우주를 궁금해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인간의 언어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세상 이치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서 과학이 탄생했다. 반면 기술, 즉 공학은 구현(Reproducing)의 학문이다. 과학이 밝혀낸 우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제한된 재료를 활용해 그것을 최대한 현실에서 구현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둔다.

미안하지만, 과학은 사실 인간의 삶에서 불편함을 덜어주거나 당장의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과학은 그 자체로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을 약속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성과는 기술, 공학의 몫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주역이 기술이더라도, 그것이 작동할 토대는 과학이 마련한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오랜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400년 전, 뉴턴은 하늘을 보며 단순한 의문을 품었다. 작고 가벼운 사과도 땅에 떨어지는데, 어째서 거대하고 무거운 달은 떨어지지 않을까? 사소하고 쓸데없는 질문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뉴턴은 그 질문 끝에, 달이 지구의 중력에 붙잡힌 채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통찰은 훗날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이론적 기반이 됐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뉴턴의 발견에 빚을 지며 살아간다. 뉴턴은 인공위성을 활용한 통신 기술, 기상 관측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는 왜 달이 떨어지지 않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더 최근의 사례도 있다. 1939년, 천체물리학자 한스 베테는 별이 어떻게 꺼지지 않고 영원히 빛나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별 내부에서 수소가 헬륨으로 변하는 핵융합 반응이 그 비결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태양과 같은 별은 한번 불이 붙으면 수십억년간 꺼지지 않는다. 그런 핵융합을 지상에 재현할 수 있다면, 인류는 에너지 고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 여러 선진국에서는 상온에서 핵융합을 구현하는 기술적 도전에 나서고 있다. 당연히 베테는 난방비 걱정 없는 삶 따위를 기대하고 연구를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궁금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던진 순수한 호기심은 기술의 손을 거쳐 인류가 풍요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1958년, 미국이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면서 제정한 국가항공우주법은 NASA의 존재 이유를 이렇게 선언한다. “우주와 외기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류의 지식을 확장한다.”

법조문 같은 딱딱한 글에서는 단어 하나, 쉼표 하나만으로도 해석이 달라진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아주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헌법 속 과학기술이라는 단어 사이에 쉼표 하나만이라도 찍어줄 수 없을까. 과학기술이 아닌 과학, 기술이라고 불러줄 수는 없을까. 그 작은 쉼표 하나가 비로소 과학을 경제 발전의 도구가 아닌, 우주와 생명을 이해하는 독립된 학문으로서 존중받는 작은 첫걸음이 될 거라 생각한다.

대선을 앞두고 여러 후보가 과학기술 발전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과학과 기술을 구분 지어 말하지 않는다. 다들 수십억, 수십조의 허무맹랑한 경제 효과를 말하며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돈을 벌어 오겠다는 약속만 내뱉고 있을 뿐이다. 그들 발언에서 과학과 기술, 그 두 가지 세계의 전혀 다른 본질에 대한 이해와 고민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기 지도자들에게 여전히 과학은 과학기술에 종속된,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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