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메달을 경매 내놨다…'DNA 아버지'의 파란만장 인생사

2025-11-09

유전 정보를 담은 디옥시리보 핵산(DNA)이 이중나선 구조라는 사실을 밝혀내, 현대 생명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DNA의 아버지’ 제임스 D. 왓슨이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은 7일(현지시간) 왓슨이 전날 호스피스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며 그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와 BBC 등은 과학적 업적과 함께 인종·성차별 논란 등 그의 인생 명암을 함께 조명했다.

1928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왓슨은 15세에 장학금을 받고 시카고대에 입학했다. 원래 조류학을 전공할 생각이었지만, 양자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유전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1950년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DNA 연구에 매달렸다. 당시에는 DNA가 유전과 관련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유전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왓슨은 케임브리지대에서 프랜시스 크릭(1916~2004)과 공동 연구를 했다. 킹스칼리지런던(KCL)의 모리스 윌킨스과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다. 크릭과 왓슨은 프랭클린의 X선 사진을 보고 DNA 구조가 ‘두 가닥이 꽈배기처럼 꼬인 사다리 형태’(3차원 이중나선 구조)라는 사실을 추론해냈고, 1953년 4월 25일 네이처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왓슨의 나이 불과 25세 때였다.

논문의 파장은 컸다. 유전의 메커니즘이 밝혀졌고 돌연변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려졌다. 유전자 치료 같은 오늘날 생명과학의 성취 대부분이 “DNA 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과학계 중론이다. 왓슨이 미국으로 돌아와 재직했던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의 브루스 스틸먼 소장은 DNA 구조 규명을 다윈의 진화론, 멘델의 유전법칙과 함께 “생물학의 3대 발견”으로 꼽았다.

왓슨은 이 공로로 1962년 크릭, 윌킨스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과학사에 남긴 큰 족적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1968년 펴낸 『유전자 분자생물학』은 지금도 “가장 영향력 있고 널리 사용되는 생물학 교과서”로 불린다. 1990년 ‘인간 유전자 지도 프로젝트(휴먼 지놈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도 왓슨이었다.

찬란한 과학적 업적과 달리 개인사는 순탄치 않았다. 그의 책 『이중나선』은 “자기 업적만 자랑하고 동료들의 기여를 폄하했다”는 평을 들었다. 2007년 영국 선데이타임스 인터뷰 땐 “아프리카인의 지능은 우리와 같지 않다”고 해 연구소에서 쫓겨났다. 그런데도 2019년 PBS 다큐멘터리에서 입장을 바꾸지 않아 그나마 갖고 있던 명예직마저 잃었다.

여성차별적 언행도 지탄을 받았다. DNA 구조 규명의 결정적 단서가 된 X선 사진을 찍은 여성 과학자 프랭클린을 ‘무례하고 비협조적인 사람’으로 묘사했고 외모 품평도 서슴치 않았다. 프랭클린은 37세의 젊은 나이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나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왓슨은 이후에도 다른 여성 과학자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잇단 문제 발언으로 사실상 과학계에서 ‘퇴출’된 왓슨은 2014년 자신의 노벨상 메달을 경매에 내놨다. “가족과 과학 연구 지원을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자신을 버린 과학계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 메달은 러시아의 한 백만장자가 410만 달러(약 55억원)에 사서 그에게 돌려줬다.

BBC는 왓슨에 대해 “생명의 비밀을 밝혀낸 ‘DNA의 대부’이자, 종종 실언을 했던 ‘세계적 논란의 인물(world-class controversialist)’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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