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트리거 60' ⑩ 2005년 호주제 폐지

1982년에 태어난 여성 중 가장 많은 이름은 김지영이다. 그의 이름을 빌린 밀리언셀러 『19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 김씨는 2012년 혼인신고서의 빈칸을 채워나가던 중 5번 항목에서 머뭇거린다. ‘자녀의 성·본을 모(母)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에서다. 김씨는 ‘아니오’에 표기했다.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하면 설명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기겠지”라는 남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소설 속 풍경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2021년 아내 김지예, 남편 정민구씨 부부는 6개월 된 딸의 이름을 ‘정정원’에서 ‘김정원’으로 변경했다. 혼인신고 당시 ‘모의 성본을 따르겠습니까’에서 ‘아니오’에 표기했기만 아버지의 성을 ‘고정값’으로 규정한 민법 조항이 양성평등을 명시한 헌법과 상충한다고 여겨 다시금 가정법원을 찾았다. 이보다 1년 전인 2020년 배세정씨는 동생과 함께 ‘성·본 변경허가 심판 청구’를 통해 아버지의 성 ‘이’ 대신에 어머니의 성 ‘배’를 새로 얻었다. 한국사회의 성차별적 가부장제 관습을 깨고 싶어서였다.

호주제 폐지-. 2005년 3월 2일 한국 가족문화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날 국회는 호주제 전면 삭제를 명문화한 민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일례로 앞서 언급한 성·본 문제가 그렇다. 혼인신고 시 부부의 협의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오직 남성의 성·본을 따라야 했던 예전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호주제 폐지의 결정적인 계기는 그해 2월 3일 헌법재판소가 내린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이다. 헌재는 “호주제는 양성평등의 원칙과 개인의 존엄성을 규정한 헌법 제36조 1항에 위배된다”고 선언했다. 국회를 통과한 호주제 폐지는 2년 9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2008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호주제는 호주를 중심으로 가(家·집안)를 구성하고, 호주는 원칙적으로 남자 자손에서 승계시키는 제도였다. 남성이 ‘가정의 주인’으로서 혈통을 잇고 혼인 및 가족, 재산 관계 등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 제도였다.
호주제 허물기에 처음 도전한 ‘퍼스트 펭귄’은 고(故) 이태영(1914~1998)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초대 회장이다. 한국의 첫 여성 법조인으로 꼽히는 그는 1950년대부터 “여인들의 고통과 눈물과 한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라며 여성인권 개선에 매진했다.
“개·돼지와 다름없다” 보수 남성 거센 반발

실제로 법률상담소에 비친 여성들의 삶은 차별과 모순투성이였다. 여자와 아내,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예컨대 결혼한 지 30년 만에 딸 셋을 남기고 남편이 세상을 떴는데, 남편이 살아생전 바깥에서 본 5살짜리 아들이 갑자기 나타나 호주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남편과 이혼하고 엄마 홀로 아이들을 키워왔는데, 아이들은 인연을 끊은 남편의 호적에 올라 있고 정작 엄마 자신은 아이들의 동거인이 된 경우도 있다.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의 성이 현재 남편의 성과 달라 곤혹스러웠던 여성 또한 한둘이 아니었다.

이태영 변호사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에너지를 축적했다. 1987년 사회민주화 운동이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호주제 폐지를 가속한 불씨는 크게 두 가지다. 1997년 3월 여성계 인사 170명이 시작한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과 그해 7월 동성동본 금혼제도에 대한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2005년 시행)이다. 하지만 난관도 많았다. 특히 유림(儒林) 등 보수적 남성들의 반발이 거셌다. “우리 민족이 개·돼지와 다름없게 되는 꼴을 볼 수 없다”고 성토했다. 『한국 가족법 읽기』를 쓴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호주제 폐지는 광범위한 여성과 남성 시민의 참여로 완결됐다. 한국의 시민혁명으로 기록돼야 한다”고 평가했다.


남아선호 현상도 호주제의 폐단 중 하나였다. 한의사 출신의 고은광순씨도 여아 낙태의 심각성을 목격하고는 호주제 폐지에 발 벗고 나섰다. “아들 낳는 처방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스무 번 낙태하고도 아들을 낳으려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것이 부메랑이 돼서 한국의 출산율도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실제로 1990년 여야 100명당 남아 116.5명으로 세계 최악 수준의 남녀 출생 성비를 기록한 한국은 2007년부터 자연 성비인 105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아들 ‘귀남이’에 밀린 수많은 딸 ‘후남이’의 서글픈 이력서에 마침표가 찍힌 셈이다.
호주제는 한국 사회를 통째로 바꿔놓았다. 가족이란 집단보다 개인이란 주체로 무게가 옮겨갔다. 호주 위주의 호적이 사라지고, 본인 중심의 ‘1인1적’ 새 신분등록제가 시행됐다. 기존 호적등본에는 이혼·범죄 같은 민감한 개인 정보가 실렸었다.
여성임금 OECD 최하위 곱씹어봐야
호주제 폐지는 한국의 가족문화 변화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이혼·재혼 가구, 한부모 가정, 입양가정, 1인 가구 등의 증가, 이른바 전통 가구의 해체와 맞물리며 전개됐다.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도 작용했다. 하지만 과제도 있다. 여성계는 혼인신고 시 아버지의 성을 따르도록 하는 부성우선주의를 또 다른 차별로 보고 있다.
특히 남녀 간 경제적 격차가 아직도 크다. ‘2024 여성 경제활동 백서’에 따르면 여성 근로자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남성의 71%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여전히 최하위다.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은 “호주제 폐지는 남녀가 함께 잘살자는 운동이었다. 폐지 직후에 사회가 결딴날 것처럼 시끄러웠지만 걱정했던 일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올해는 해방 80주년이다. 이태영 변호사는 1967년 광복절에 이런 글을 남겼다. “8·15는 인습과 전통에서의 해방이었다. 부모에겐 딸로서 남편에겐 아내로서 아들에겐 어머니로서 오직 희생적 종사(從事)만이 강요된 종적 존재로서의 여성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횡적으로 존재하게 되고, 개성 있는 독립된 인간으로 승격된 경축일이었다.”
호주제 폐지 20년을 맞는 오늘에 주는 울림이 크다. 2025년에 태어난 또 다른 ‘김지영’이 앞으로 그려갈 남녀 지형도는 지금보다 더욱 평평해질 것이다.
부계 혈통주의, 자연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워

“20여 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좀 더 용기 있게 나서겠다.”
최재천(71·사진)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진화론의 대중화에 앞장서 온 사회생물학자다. 2003년 말 호주제 위헌 여부를 가리는 마지막 공개 변론에서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그는 재판정에서 “부계 혈통주의는 자연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의 계통을 밝히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비교 분석하면 암컷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제는 인류 집단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과학자의 호주제 발언이 의외였다.
“그것도 법정에 나가 진술한 사례는 외국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듬해 미국에서 열린 동물행동학 국제회의에서 예정에 없던 즉석 강연을 요청받기도 했다.”
헌재 법정까지 나간 계기라면….
“2000년 EBS에서 ‘여성의 세계가 밝았다’를 주제로 특강한 적이 있다. 생물계의 주체는 암컷이라는 요지였다. 그때 호주제 위헌 소송을 이끈 이석태 변호사(당시 민변 회장, 전 헌법재판관)가 도움을 요청해 함께하게 됐다.”
봉변도 많이 당했다고 들었다.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다. 주로 남성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방송이 나간 뒤 1년 동안 전화 코드를 뽑아놓을 정도였다.”
남성을 위한 운동이라고 했다.
“헌재 의견서에서도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호주제 폐지를 환영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가부장 계급장을 떼어내면 남성들도 편해진다. 외국보다 높은 한국 40~50대 남성의 사망률도 낮아진다. 지금도 그 생각엔 흔들림이 없다.”
그동안 세상이 변한 것 같은가.
“예전과 여러모로 달라졌다. 요즘엔 젊은 남성들이 되레 여성에 불만을 터뜨리는 ‘여혐’ 현상이 심각하지 않은가. 과학자로서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