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 일제 강점의 사슬에서 풀려나 빛을 되찾은 지 80년이 됐다. 해방 직후 남북 분단에 이은 한국전쟁, 두 차례의 군사쿠데타, 외환위기 등 시련을 이겨내고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자리 잡은 그간의 과정은 기적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화·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해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에 인구 5000만명의 ‘30-50클럽’에 진입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올해 광복절은 8개월 전 전직 대통령 윤석열의 불법계엄으로 인한 헌정중단 위기를 넘긴 뒤여서 더 의미가 각별하다. 누란의 위기에서 민주주의를 구해낸 주체가 ‘가장 밝은 빛’을 들고나와 거리를 메운 시민들이었음은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파면 결정문에서 밝힌 대로다. 극우의 발호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한국 시민들이 보여준 ‘민주주의 회복력’(resilience)은 인류의 자산으로 기억될 가치가 있다. 4·19, 5·18, 6·10, 12·3으로 이어진 시민들의 저항·연대 정신은 일제강점기 선조들이 국내외에서 벌였던 치열한 독립투쟁과도 닿아 있다. 한국의 해방을 거저 얻은 것으로 간주하는 ‘자학적 사고’는 일제하 독립투쟁사를 온전히 조명하고 발굴하지 않은 불찰에서 비롯됐음을 성찰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정치 분야에 국한된 성취가 아니라, 한국을 경제번영으로 이끈 원동력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바탕이 된 포용적 경제 제도가 번영을 이끈다는 경제학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투명한 시장경제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한 단계 더 높은 성장을 거둔 한국의 사례에 부합한다. 법치와 투명성, 표현의 자유 속에서 성장한 K콘텐츠의 매력이 세계적 열광을 이끌어내고 있다. 제국주의·식민주의 ‘원죄’가 없는 한류는 세계인들이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글로벌 자산으로 손색이 없다.
세계 질서의 전환기 속에 맞는 광복 80년은 또 다른 도전을 향한 출발점이다. 안팎에 난제들이 겹쌓여 있다. 국내적으로는 내란 잔재 청산과 통합의 바탕 위에서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세대·성별 간의 갈라진 틈을 메워야 한다. 자산 불평등과 노동시장 이중구조,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일터 안전 등 문제도 풀어야 한다. 저성장 기조 속에 중국의 거센 추격과 미국의 정책적 압박으로 입지가 흔들리는 한국 산업의 혁신과 성장동력 역시 중차대한 과제다. 자칫, 거울나라의 앨리스처럼 ‘죽어라 뛰어야 제자리’를 유지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핵무력 완성에 더해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을 강화하고 있는 북한과 협력해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는 일은 힘겹지만 짊어져야 할 숙명이다. 미·중 간 전략적 경쟁 구도 속에서 한·미 동맹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중국과 호혜적 관계를 발전시켜야 하는 국익외교의 고차방정식도 풀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 차이를 극복하고 ‘미들파워 연대’를 구축함으로써 세계 자유무역 질서를 유지·발전시키는 일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오는 23일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역사를 직시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바탕 위에서 양국 협력의 새로운 기초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역사가 토인비의 말처럼, 1945년부터 2025년까지 한국의 지난 80년은 문명이 안팎의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된다는 걸 입증한 시간이다. 성공신화에 취하는 것은 금물이나, 자기비하나 비관도 바람직하지 않다. 해방 후 80년의 성취에서 자긍심을 갖되, 긴장감을 잃지 않고, 정치·외교·경제·과학기술·민생·한류까지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