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못 보겠제. 버스에 타고 떠나는 내게 손을 흔드는 외할머니의 몸짓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구부정해져버린 허리 탓에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동네 어귀까지 나와서 손자의 손을 어루만지고 버스가 떠난 후에도 그곳에 오랫동안 앉아 계셨다. 할머니에게 우리 만남은 늘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었다. ‘운 좋게’ 손자를 다시 보면 다시 마지막인 양 온 힘을 다했다. 나는 그걸 몰랐다. 때로는 귀찮다는 듯 할머니 손에서 서둘러 내 손을 빼냈다. 마지막인 줄도 몰랐던 마지막이 머지않아 다가왔고, 버스 뒤편에 이젠 외할머니가 없다는 걸 알고 나서야 나는 슬퍼했다. 왜 달리 마지막이라고 하겠는가. 되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마지막을 빨리 깨닫고 그 이전에 세상과 연을 끊은 사람이다. 히틀러의 폭정이 시작되자 그는 전쟁과 학살의 그림자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주위 사람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강대국들도 걱정 말라고 할수록 그에게는 마지막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1차 세계대전도 그렇게 시작됐는데, 사람들은 금세 잊고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더 이상 없다는 고문과 암살이 건물 지하로 스며들었고, 군복을 챙겨입고 자랑스럽게 행진하는 젊은이들도 늘었다. 이젠 멸종됐다던 전쟁이 마침내 세상의 중심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무기력과 공포가 덮쳐왔다. 마지막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세계에서 홀로 마지막처럼 싸우기가 버거웠다. 츠바이크는 자살한다. 모든 그림자는 결국 빛의 아이일 뿐이고, 빛과 그림자를 다 보아온 자만이 삶을 온전히 산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물리적 시간은 불가역적이지만, 역사의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가역적이다. 힘들게 일군 성취인 만큼 굳건하게 버틸 것이라는 믿음은 찬란하지만 어리석다.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그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열정과 믿음은 쉽게 배반당한다. 질투와 이익을 좇는 자는 어설프게 믿는 자보다 더 치밀하기 때문이다.
츠바이크를 죽게 만든 독일이 그랬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민들은 그들이 이룬 거대한 민주주의적 성취를 알면서도 경제위기의 고통에 지쳤다. 실업자가 수백만명 늘어나고 물가도 치솟자 사람들은 대안에 목말랐다. 히틀러는 그때 일자리와 경제회복을 약속했고, 민족적 자부심을 호소했다. 민주주의가 허약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던 까닭에 ‘권위주의적 안정성’도 괜찮은 해법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그가 위험해 보였지만, 민주주의가 쉽사리 무너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집 안에서 온 정성으로 돌봐야 과실을 내어주는 레몬 나무 같은 민주주의를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박달나무로 착각했다.
망각과 착각의 대가는 가혹했다. 독일 시민들이 나치에게 44%에 달하는 표를 몰아주었을 때 그것이 마지막 자유선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걱정이 없지 않았으나 과반은 아니었다고 위안했고, 충격요법으로는 괜찮다는 평가마저 있었다. 의회가 버티고 있으니 나치당이 제대로 못하면 다음번에 투표로 응징하면 된다는 생각도 만연했다. 일단 두고 보다가, 나중에 고치면 된다는 것. 히틀러는 이를 알고 선수를 쳤다. 시민들이 막연하게 믿었던 ‘제어장치’인 의회 자체를 해산해버린 후 쏜살같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이 일을 앞장서서 했던 사람은 군인이 아니었다. 온갖 학살 행위를 주도한 ‘작전그룹’의 주요 사령관들은 대부분 법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었다. 폴란드의 점령사령관으로서 수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자는 변호사 한스 프랑크다. 법은 법률가들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휘두르는 도구일 뿐이었다.
이런 역사는 그 이후 반복됐다.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아시아에도 흔하디흔하다. 그래서 예일대학의 티머시 스나이더가 지난 20세기를 돌이켜보며 전제주의 정부에 관한 스무 가지 교훈을 제시했을 때 그 세 번째는 당연히 이것이었다. “어떤 선거도 마지막 선거일 수 있다. 적어도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투표일 수 있다.”
‘설마’라고 하지 말자. 그 말에서 히틀러가 나왔고 그를 닮은 폭정이 반복됐다. 그러니,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투표하자. 내 손의 작은 먼지 하나까지 털어내면서 끝까지 어루만지던 내 할머니처럼 사소한 차이도 꼼꼼하고 크게 챙기자. 이번이 마지막 선거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